[만리재에서] 혐오는 훈련된다
등록 : 2020-05-15 15:40 수정 : 2020-05-16 10:21
2004년 12월11일 한센인(한센병 환자와 병력자) 700여 명이 모여 사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 한국과 일본 변호사가 일제강점기 때 강제 수용된 소록도 주민을 대리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면서, 재판 상황을 보고하는 자리가 열렸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50여 명이 강당에 모여들었습니다. 한센병을 앓았던 어르신들은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를 타거나 바닥에 앉은 채 변호사들의 설명에 귀 기울였습니다. 강당 구석에서 취재하는데 한 할머니가 앞으로 고꾸라질 듯 위태롭게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장 도와드려야 할 것 같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그러진 얼굴과 잘려나간 팔다리가 낯설고 또 두려웠습니다. 머뭇거리는 사이 일본 여성 변호사가 거침없이 달려가더니 할머니를 감싸안았습니다. 그러고는 서툰 한국어로 물었습니다. “괜찮아요?”
16년이 지난 일이지만, 내 안의 편견이 불쑥 튀어나왔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괴롭습니다. 그날의 부끄러운 행동은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됐습니다. 한센병은 전염성이 약해 격리가 필요하지도 않고, 약물 복용으로 1~2년이면 완치되는 병인데도 어릴 적부터 ‘나병’ ‘문둥병’이라 부르고 괴기한 이야기도 많이 주워들은 탓이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살면서 한센인을 만나본 적 없다는 것도 편견의 한 원인이었을 겁니다. 치료 시기를 놓친데다 고된 노동으로 손과 발이 변형된 한센인을 그날 처음 만났습니다.
그 뒤 한국 변호사들과 함께 몇 차례 소록도를 더 찾아가면서 낯섦은 익숙함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어느 날, 취재를 마치고 섬을 떠나려는데 한 할머니가 뭉뚝한 손으로 제 등을 쓰다듬었습니다. “고마우이.” 돌아서서 할머니를 안아드리는데 괜스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말하지 못했지만 편견에 빠져 있던 것이 죄송스럽고 그 편견에서 벗어난 것이 다행스러웠습니다. 일본과 한국 정부에서 한센인 배·보상 판결을 이끌었던 한센인권변호인단이 설립한 공익법인 ‘함께하는 빛’에 참여하며 지금도 한센인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1313호는 편견과 차별, 혐오에 관한 이야기를 여럿 담고 있습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과 MB 국가정보원은 뼛속까지 노조를 싫어했습니다.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민주노총을 ‘3대 종북좌파’라고 규정하고 이들을 파괴하려는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의혹으로만 떠돌던 작전의 전모가 10년이 지난 2020년, <한겨레21>이 입수한 국정원의 ‘노조 와해 공작’ 국고손실 재판기록 1만여 쪽을 통해 밝혀집니다. 국정원 내부 문건에는 노조 혐오가 가득합니다(표지이야기).
코로나19에 대한 공포와 손가락질은 중국인 유학생, 신천지예수교 신도에 이어 성소수자로 향합니다.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 탓에 성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은 성소수자들이 더 숨어들고 결국 이러한 낙인과 차별은 감염병 예방에 걸림돌이 될 모양입니다(이슈 ‘법의 이름으로 아우팅?’).
편견과 차별, 혐오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독일 언론인이자 작가인 카롤린 엠케는 책 <혐오사회>에서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독일 클라우스니츠에서 시위대가 난민이 탄 버스를 가로막고 “꺼져, 꺼져”라고 소리칠 때 이들이 증오를 발산하고 또 증폭할 수 있는 이유는 침묵 속에 지켜보던 구경꾼들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행동이 증오에 힘을 보태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내 안의 편견을 마주하고 덜어냈던 오래전 부끄러운 기억을 오늘, 다시금 되새김질하는 까닭입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