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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만리재에서]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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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4-04 15:56 수정 : 2020-04-2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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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1999년 10월 어느 토요일 아침 캐나다 몬트리올의 작은방. 일찍 일어나 가을 단풍에 하얀 눈이 떨어진 낯선 모습을 창가에서 지켜보다 노트북에 눈을 돌렸습니다. 전화 모뎀선으로 내려받은 <한겨레21> PDF 파일이 열려 있습니다. 한 주 내내 영어 기사를 쓰며 씨름한 내게 주는 선물로 금요일이면 <한겨레21>을 밤새 내려받습니다. 인터넷에 기사들이 올라 있지만 굳이 7시간이나 걸려야 손에 쥘 수 있는 PDF 파일을 고집합니다. 잡지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숨결이 조금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21>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한장 한장 넘기며 주말 내내 즐겁게 읽었습니다. 특히 신윤동욱 기자의 ‘마이너리티’(소수자)는 손글씨로 받아쓰며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한겨레21>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순간이.

2012년 4월 어느 월요일 아침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21> 뉴스룸. 일찍 출근한 편집장이 쭈뼛쭈뼛 서 있는 내게 빈 책상을 가리키며 ‘정은주씨의 자리’라고 알려줍니다. 노트북을 꺼내고 신문을 읽는데 한 남자가 옆에 앉더니 인사합니다. “신윤동욱입니다.” ‘캬앗’ 비명이 터져나올까봐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그는 나를 전혀 모르지만, 나는 그를 너무 잘 압니다. 기자가 된 지 10년이 넘은 ‘주니어’ 기자지만 그의 기사는 변함없이 내 교재이니까요. 달아오르는 얼굴을 보일까봐 푹 숙이며 “안녕하세요, 선배”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한겨레21> 기자가 되어 행복한 순간이.

2012년 6월18일 제915호 ‘힐링 투게더: 고문 피해자, 해고 노동자를 치유하다’부터 2016년 3월21일 제1103호 ‘지워지고 사라지고 은폐당한 세월호 10가지 진실, 101분의 기록’까지 <한겨레21>를 꽤 만들었지만 표지이야기를 쓰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몇 주간 사람 사이와 현장을 종종거리고 취재하고도 마감 전날이면 기사와 힘겨루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새벽 2~3시께 글자로 가득해야 할 노트북에 홀로 껌뻑거리는 커서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잘하는 일이 따로 있지 않을까.’ 그 고통스러운 마감이 지나가면 그러나, 또 새로운 <한겨레21>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한장 한장 넘기며 주말 내내 즐겁게 읽었습니다. 내 기사를 쓰는 데 급급해서 마감날에는 편집장의 ‘만리재에서’부터 동료 기자들의 기사까지 꼼꼼히 보지 못했으니까요.

제1307호는 <한겨레21>이 발간되기 전에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고 또 읽은 첫 번째 잡지입니다. 표지이야기 ‘이윤택 #미투 르포’, 특집 ‘4·15 총선’ 그리고 이슈 ‘엔(n)번방’을 데스킹했습니다. <한겨레21> 21년 독자, <한겨레21> 4년 기자였지만 <한겨레21> 편집장은 처음입니다. 기사와 편집 전체를 아우르는 편집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는 듯하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래도, 그래도 설렘이 다가옵니다. 경험과 지혜를, 무엇보다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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