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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상한 천연덕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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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2-28 15:21 수정 : 2020-06-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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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와해’ 목적의 ‘직원 사찰’은 삼성뿐만 아니라 신세계 이마트에도 있었습니다. 2013년 1월 <오마이뉴스>가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삼성과 뿌리가 같은 기업이니만큼 전체적인 계획이나 실행 방법, 쓰는 용어 역시 엇비슷합니다. 신세계 이마트는 보도가 나온 지 며칠 안 돼 ‘직원들의 일탈’이라는 취지로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를 했죠.

당시 삼성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한겨레21>이 입수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재판기록 가운데 삼성의 이마트 사건 언급이 담긴 문건이 있습니다. 미래전략실 강경훈 부사장 주관으로 계열사 인사 담당 임원이 참석하는 화상회의 내용의 일부입니다. 그대로 옮겨 적겠습니다.

“금번 사건도 지난 2012년 10월 발생한 노무법인 창조컨설팅 문제와 같이 내부 자료 관리 소홀에 따른 것입니다. 거듭 강조드리지만 그룹의 경우에도 인노사(인사·노사) 관련 문서가 외부로 유출되면 인터넷 등 대중매체를 통해 언론 이슈화가 됨과 동시에 김성환(삼성일반노조 위원장)·금속노조 등 외부 불순세력들이 이를 빌미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사를 공격할 것입니다. 각사에서는 사업장 내부 보안 문서 유출 등 위험 요소가 없는지 다시 한번 꼼꼼하게 점검해 불필요한 문서 및 자료는 모두 폐기하고 보안이 체득화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떠신가요? 삼성도 이마트와 같은 ‘일탈’을 하고 있었고 이마트의 행위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의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문제가 된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인정했다면, 이마트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았어야 제대로 된 기업이겠죠. 그런데 삼성이 내린 결론은 이런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걸리면 큰일 나니까 걸리지 말자. 문서 관리 똑바로 하자.’

삼성 내부 문건을 볼 때마다 제가 계속 떠올렸던 단어는 ‘천연덕스럽다’였습니다. 직원들의 ‘번아웃’(탈진)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면서도, 노조를 와해하기 위해 세운 전략의 이름이 ‘번아웃’이었습니다. 인사 전략에 ‘임직원 마음건강 관리’ ‘글로벌 인적자원 경쟁력 강화’ 같은 바람직한 인사관리 목표에 ‘노조 와해’가 버젓이 동급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런 목표들을 오행(五行) 색깔에 견줘 표현하기도 했는데, 노조 와해에 해당하는 내용은 ‘흰색’이더군요. “결백과 진실, 진정성을 의미”한답니다.

사실 이런 문건을 발견하면, 기자로서 아드레날린이 빡 터져나와 열심히 취재해서 일필휘지로 기사를 썼어야 정상일 텐데, 수북이 쌓인 문건들을 넘기면서 오히려 무력감이 쌓여갔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리 천연덕스럽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알면서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지?’라는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지난호에 다루지 못한 내용을 이번호 특집으로 실었습니다. 다음호에도 관련 기사를 쓸 예정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모두가 혼란스럽지만, 끝까지 제대로 다뤄보겠습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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