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현 한예종 무용원 명예교수가 1298권의 <한겨레21> 곁에 앉아 있다.
<한겨레21>을 모아놓은 캐비닛 가장 많이 모았던 것은 <한겨레> 신문이었다. 1988년 5월15일부터 2001년 9월30일까지 모은 신문을 학교(한예종)에 기증했다. 학교에서 자료를 헤아려보니 10호 정도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때 신문을 기증한 것은 부인 이은희씨가 “더 이상 침범하지 말라”고 ‘황제적 컬렉터’에게 항의하면서였다. 부부는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같은 집에서 25년째 살고 있다. 신혼 때 얻은 집이 모은 자료로 좁아져서 150m 떨어진 집으로 이사한 뒤로 쭉이다. 35평은 되는 건물의 지하부터 2층까지 그가 모으는 자료로 가득하다. 지하는 자료 보관용으로 제쳐뒀고, 2층 생활하는 공간도 긴 벽이 테이프로 가득하다. 40년 된 집이라 겨울에는 난방이 잘 안 될 정도로 벽이 얇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없다. 새롭게 마련한 공간 아카데미아인에는 추려서 자료를 모았다. 무용원에 있던 교수실을 그대로 옮긴 방, 중요 자료를 위한 방, 그리고 강의실로 쓰는 방에는 <한겨레21>을 담아놓은 캐비닛이 있다. 기자를 맞기 전 <한겨레21> 500호와 1000호 특별부록으로 제공된 표지 인덱스를 펼쳐놓았다. 표지를 일일이 기억하고 기자들의 글버릇을 알고 있다. “옛날에 오래 있던 그 기자(이름과 분야를 정확하게 댔다)는 ‘게다’를 많이 썼다. 진중권이 오히려를 외려로 쓰는 것과 비슷하게.” 이명박 집권 초기 파시즘에 비유한 표지 등은 속이 시원할 정도로 좋았다. 김윤옥 여사의 한식 세계화를 다룬 표지이야기는 여러 번 읽었다. <한겨레21>이 무용 기사를 다룬 적이 많지 않았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충실한 보도와 품격 있는 소화”를 <한겨레21>의 장점으로 들었다. 그는 <한겨레21>을 ‘사초’라고 말한다. “역사 속에 맥락, 배경을 정확하게 위치시키고 사회 이슈에서 이야기되는 지점을 놓치지 않고 풀어냈다.” 26년 역사에서 한동안 실망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어느 시기는 어정쩡한 기사를 썼고 어느 시기는 폭풍 같았다. “<한겨레21>은 대중 지향이다. 품격과 신뢰와 사회적 책임 여러 사이에서 노력을 많이 한다. 하나의 언론이 모든 걸 할 수 있을까. 결함이 다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질감과 실감 그리고 수면용 류이근 편집장이 후원자·구독자 모임을 연다고 해서, 마침 가까운 데이기도 해서 가려고 했는데 그날 촬영이 잡혀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른 아쉬운 점도 있다. “그런데 <한겨레21>은 잔정이 없는 것 같다. 오랫동안 정기구독을 하면서 몇 프로 할인받는 것 외에 혜택이 없다. 주주(그는 당연하게도 한겨레 창간주주다)한테도 혜택이 없다.” 아직 배달이 안 되었을까봐 <한겨레21> 제1299호를 건네자, “오늘 올 텐데”라고 말하면서도 기쁘게 건네받는다. 이은희씨는 “나는 어제 인터넷으로 봤지”라고 말한다. 김 명예교수는 “인터넷으로 안 본다. 질감이, 실감이 다르다. 잠을 청할 때도 좋다. 꼭 보면서 잠든다.” 이은희씨의 지청구가 한 번 더 날아들었다. “꼭 불을 켜고 잔다니까요.” 글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