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생’이 싫다면
등록 : 2018-04-16 14:31 수정 : 2018-04-16 14:49
느닷없이 독자님께 퀴즈 하나 드립니다. 자기가 사는 시·군·구를 이끄는 시장·구청장·군수의 이름을 아시는 분?
모르신다고요?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는 서울 동대문구 구청장이 누군지 모릅니다. 구청장도 모르는데 구의원·시의원의 이름을 알 리 없습니다. 그동안 잘난 척하며, 한국 정치를 위해 ‘풀뿌리 정치’를 활성화해야 하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써왔지만, 저 역시 동네 구청장 이름도 모르는 ‘허당’일 뿐입니다.
최근 한국 정치의 주요 화두는 ‘지방분권’입니다. 중앙정부가 갖고 있던 입법권·재정권 등을 일부 지자체에 부여해 풀뿌리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구상입니다. 그러나 지자체는 지금도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생활정치 분야에서 적잖은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처음 인식한 것은 14년 전인 2004년 3월 말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한겨레>의 2년차 기자로 서울시청에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막 조성이 끝난 서울광장에서 ‘서울시 학교급식조례 제정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시청 기자실은 하루에도 여남은 개의 기자회견이 열리는 바쁜 곳입니다. 그런데 이 기자회견을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회견장에 뭔가 알 수 없는 두툼한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것은 무엇일까’ 싶어 가까이 가보니, 뜻밖에도 수십 개의 라면 상자(!)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초·중·고생들에게 ‘우리 농산물’로 만든 좋은 급식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회에 제출한 급식법 개정안은 수년째 제대로 된 심의도 못 받고 묻혀 있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답답해진 시민단체 내부에선 국회에 기대지 말고 서울시 등 지자체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보자는 의견이 나옵니다.
그렇게 판단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줄 지방의회 의원을 소개받아 그를 통해 조례 제정을 추진하면 됩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이 다수를 점하던 서울시의회에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의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들은 지방자치법 제15조에 보장된 ‘조례의 제정과 개폐 청구권’이라는 조항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조항은 일정 수 이상의 시민들이 서명을 모아 지자체장에게 그들이 원하는 내용이 담긴 조례를 만들거나, 없애거나, 바꿔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당시 급식운동을 이끌던 학교급식네트워크,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민주노동당 서울시지부 등이 아이들에게 우리 농산물을 먹이는 것을 뼈대로 한 ‘서울시학교급식지원조례안’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2003년 10월1일 운동본부를 발족합니다.
서울시에 조례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최소 서명 인원은 몇 명이었을까요? 서울은 큰 도시이니 500명, 아니 5천 명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무려 14만 명이었습니다. 한두 명의 ‘똘똘한’ 지방의원이 관심을 기울였으면 쉽게 할 수 있었을 조례 발의를 위해 수백~수천 명의 시민이 6개월 동안 미친 듯 서명 작업을 벌여 그 결과물인 14만6258명의 서명용지를 커다란 라면 상자에 담아 이날 기자회견을 연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급식 운동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드디어 큰 정치 현안이 됐고, 결국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셀프탄핵’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딱, 한 명의 시의원이 관심을 기울였으면 됐을 일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한겨울 거리로 나서 그 ‘개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겨레21>이 지방의회와 시민사회가 한 몸처럼 단단히 결합된 독일 풀뿌리 민주주의 현장을 돌아본 이유입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