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개혁의 이면 인상적
중국 농민의 몰락을 다룬 움직이는 세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동안 중국 개혁정책의 겉만 우리 언론에서 봐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합니다. 이 세상에 만인이 평등한 참세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세계화의 흐름인 양 좌지우지돼온 한국 언론에 부끄러운 이야기들 같습니다. 세상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죠. 밝은 쪽이 있다면 어두운 쪽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구소련의 개혁정책과 현재의 사회모습, 중국의 개혁정책과 그 이후의 모습이 닮아간다는 생각을 하며 과연 그것만이 길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조금은 부풀려진 세계화의 이미지, 초강대국 미국의 논리 앞에 무너져버리는 세상을 바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세상이 허상 속의 존재일지라도 인간끼리의 정의가 지켜지는 사회를 위해 노력해가야겠지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박용호 purunfer@yahoo.co.kr
오태양씨를 응원합니다
저는 군대에 다녀왔지요. 아무런 갈등도 없이 당연히 가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번호 논단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오태양씨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획일적일까 하는 생각 때문에요. 소수의 생각을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나마 오태양씨를 응원하겠습니다. 하지만 유승준씨는 응원할 마음도 위로할 마음도 없네요. 하지만 제가 그 입장이라도 똑같이 했을 것 같은 기분은 드네요. 우리나라의 군제도가 다수의 횡포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길 바랍니다. 인터넷 독자 병역의무는 공평해야 논단 ‘유승준과 오태양’을 유심히 읽었다. 유승준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군 입대를 거부한 사람이다. 오태양도 군 입대를 거부하지만 그 대신 병역의무에 준하는 책임을 수행하고 싶어한다니 도덕적으로는 비난할 수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국가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립경제, 자주국방, 나아가 정의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자주국방을 위해서 부득이 온 국민에게 주어진 병역의무는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의사회가 되기 위해서라도 모든 의무가 공평하게 집행돼야지 특정인에게 혜택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가 없으면 양심의 자유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송기열/ 전남 순천시 동외동 신분상승의 폐쇄적 구조 탓 한완상 전 교육부총리의 학벌타파 발언에 대한 관료사회의 반발은 어쩌면 예상된 것이다. 관료사회는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도 더 학벌이 강조되는 곳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장관 중 ‘비서울대’ 출신이 몇명이나 되는가. 얼마 전 신문에서 진념 경제부총리가 “지방마다 명문대가 있었던 일제시대가 교육이 더 좋았다”고 발언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의 눈에는 교육도 경제적 측면의 효율성이란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는 분야로 보였을까? 명문대에서 육성되는 이른바 ‘인재’들이 생산하는 부보다 그를 위해 소비되는 사교육비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이러한 상황에서 학벌타파를 위한 교육부의 노력은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는 기업 입사원서의 학력란 폐지 정도로 무너질 것이 아니다. 나는 학벌주의의 근본적 원인을 우리 사회의 신분상승에 대한 폐쇄성으로 본다. 우리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상류층이 되는 길은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 가는 길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분야를 통해 성공할 수 있고 그 성공이 사회적 지위상승으로 이어지는 기회가 확대된다면 ‘서울대’에 집착하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다. 학벌주의가 마치 자본주의의 상징인 양 말하는 사람들은 프랑스나 독일에 명문대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나 봤을까. 이수행/ 광주시 북구 누문동 우리 사회의 양심적 지식인은 부르디외는 사회철학뿐만 아니라, 세계 지성계에서 시대의 양심을 대변한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물론 유능했고, 자신의 소리를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그의 소리가 세계에 받아들여졌던 것은 따라서 대중적인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뒷받침해주었던 그의 재능과 자리(교수로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한국사회에도 수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으로 시대를 논하고 역사를 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자리가 마련되지 못한 양심적 지식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역사와 사회의 대변자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종교와 정치 그리고 문화와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을 가진 지식인들의 자기유희와 과시로서의 이론이 아닌, 진정으로 타자를 위한 그런 양심적 지식인들이 이 사회에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터넷 독자 공동육아, 좀더 풍부한 정보를 항상 <한겨레21>을 통해 세상을 조금이나마 넓게 보려고 노력중인 독자입니다. 이번호 기사들 중 특집2에서 다룬 공동육아 문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사내용 ‘510만 대 1500’에서 드러나듯 그다지 일반적이지만은 않은 시도이지요. 하지만 그런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좋은 기획만큼 많은 정보를 제공했더라면 하는 점입니다. 상자기사에 나온 공동육아의 연혁만으로는 그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게 되지는 않더군요. 아울러 공동육아와는 조금 개념이 다를 수 있겠지만 몇몇 철거촌 영세지역에 존재하는 공부방에 대해서도 다뤄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정호/ 서울시 관악구 신림2동 독자만화
저는 군대에 다녀왔지요. 아무런 갈등도 없이 당연히 가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번호 논단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오태양씨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획일적일까 하는 생각 때문에요. 소수의 생각을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나마 오태양씨를 응원하겠습니다. 하지만 유승준씨는 응원할 마음도 위로할 마음도 없네요. 하지만 제가 그 입장이라도 똑같이 했을 것 같은 기분은 드네요. 우리나라의 군제도가 다수의 횡포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길 바랍니다. 인터넷 독자 병역의무는 공평해야 논단 ‘유승준과 오태양’을 유심히 읽었다. 유승준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군 입대를 거부한 사람이다. 오태양도 군 입대를 거부하지만 그 대신 병역의무에 준하는 책임을 수행하고 싶어한다니 도덕적으로는 비난할 수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국가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립경제, 자주국방, 나아가 정의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자주국방을 위해서 부득이 온 국민에게 주어진 병역의무는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의사회가 되기 위해서라도 모든 의무가 공평하게 집행돼야지 특정인에게 혜택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가 없으면 양심의 자유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송기열/ 전남 순천시 동외동 신분상승의 폐쇄적 구조 탓 한완상 전 교육부총리의 학벌타파 발언에 대한 관료사회의 반발은 어쩌면 예상된 것이다. 관료사회는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도 더 학벌이 강조되는 곳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장관 중 ‘비서울대’ 출신이 몇명이나 되는가. 얼마 전 신문에서 진념 경제부총리가 “지방마다 명문대가 있었던 일제시대가 교육이 더 좋았다”고 발언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의 눈에는 교육도 경제적 측면의 효율성이란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는 분야로 보였을까? 명문대에서 육성되는 이른바 ‘인재’들이 생산하는 부보다 그를 위해 소비되는 사교육비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이러한 상황에서 학벌타파를 위한 교육부의 노력은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는 기업 입사원서의 학력란 폐지 정도로 무너질 것이 아니다. 나는 학벌주의의 근본적 원인을 우리 사회의 신분상승에 대한 폐쇄성으로 본다. 우리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상류층이 되는 길은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 가는 길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분야를 통해 성공할 수 있고 그 성공이 사회적 지위상승으로 이어지는 기회가 확대된다면 ‘서울대’에 집착하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다. 학벌주의가 마치 자본주의의 상징인 양 말하는 사람들은 프랑스나 독일에 명문대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나 봤을까. 이수행/ 광주시 북구 누문동 우리 사회의 양심적 지식인은 부르디외는 사회철학뿐만 아니라, 세계 지성계에서 시대의 양심을 대변한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물론 유능했고, 자신의 소리를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그의 소리가 세계에 받아들여졌던 것은 따라서 대중적인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뒷받침해주었던 그의 재능과 자리(교수로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한국사회에도 수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으로 시대를 논하고 역사를 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자리가 마련되지 못한 양심적 지식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역사와 사회의 대변자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종교와 정치 그리고 문화와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을 가진 지식인들의 자기유희와 과시로서의 이론이 아닌, 진정으로 타자를 위한 그런 양심적 지식인들이 이 사회에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터넷 독자 공동육아, 좀더 풍부한 정보를 항상 <한겨레21>을 통해 세상을 조금이나마 넓게 보려고 노력중인 독자입니다. 이번호 기사들 중 특집2에서 다룬 공동육아 문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사내용 ‘510만 대 1500’에서 드러나듯 그다지 일반적이지만은 않은 시도이지요. 하지만 그런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좋은 기획만큼 많은 정보를 제공했더라면 하는 점입니다. 상자기사에 나온 공동육아의 연혁만으로는 그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게 되지는 않더군요. 아울러 공동육아와는 조금 개념이 다를 수 있겠지만 몇몇 철거촌 영세지역에 존재하는 공부방에 대해서도 다뤄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정호/ 서울시 관악구 신림2동 독자만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