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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위안부’와 서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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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05 14:28 수정 : 2018-02-06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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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이 쪼금 넘은 놈을 끌고 가서 강제로, 그 울면서 안 당할라고 막 쫓아나오면, 붙잡고 안 놔줘. 붙잡고 안 놔줘요. 이놈의 새끼가, 일본놈의 새끼가, 군인놈의 새끼가.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죽기 전에, 내 눈감기 전, 생전에 한번 분풀이, 꼭 말로라도 분풀이하고 싶어요.”

2016년 여름께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쓴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라는 책을 번역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사연을 처음 보도한 기자로 역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 책을 번역하며 김 할머니의 실제 기자회견 발언이 궁금해져 관련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할머니의 피끓는 육성을 직접 들으니 그가 평생 이고 살았을 고통의 무게가 그대로 전해져와 마음이 쓰렸습니다.

1991년 8월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열린 김 할머니의 기자회견은 ‘위안부’라는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세상에 알린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해방 뒤 40여 년이 지나서야 첫 증언이 나왔느냐고요?

여성들이 침묵했던 것은 아닙니다. 김학순 할머니 이전에도 자신의 피해를 세상에 알린 ‘커밍아웃’은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1975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 알린 배봉기 할머니가 있습니다. 배 할머니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도움을 받아 생활해온 인물이었으니 한국 언론이 그 사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긴 힘들었습니다.

그 밖에도 사례는 많습니다. 한혜인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객원연구원(역사학 박사)이 2015년 8월 <한겨레>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소개해볼까요.

이남님이란 이름의 여성은 1982년 <여성동아> 9월호에 실린 ‘독점수기: 나는 일본군의 정신대였다/ 일본군은 내 젊음을 이렇게 짓밟았다’를 통해 자신이 겪은 위안부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기사에 따르면, 이남님은 1927년생으로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만 17살이던 1945년 마을에서 동네 친구 박순단과 함께 버마 랑군으로 강제 동원됐습니다. 마을 면직원과 구장(이장)은 “정신대는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하거나 군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월급이 40원”이라고 했지만, 랑군에 도착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혹독한 위안부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꼭꼭 숨어 살다가 내 육신과 함께 비밀로 땅속에 묻어버리려 했는데, 내 과거가 탄로나 이렇게 여기에 털어놓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192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노수복 할머니는 21살이던 1942년 일본군에 끌려가 부산의 “일본군이 득실거리는” 해군 함정에 오르고서야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이 현지에 남겨집니다. 그의 사연이 알려진 것은 타이 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고국의 부모를 찾아달라고 탄원했기 때문입니다. 1984년 5월 서울에 온 할머니는 한국말을 이미 잊은 상태였지만 동생이 부르는 <아리랑>은 따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 밖에 1984년 4월호 <레이디경향>이 보도한 배옥수 등 주목받지 못하고 잊힌 피해자가 많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참혹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돕기 위해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난 1월29일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한 명의 남성으로서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여성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지 못했을 뿐 그들이 침묵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번 폭로가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커밍아웃처럼 한국 사회를 근본부터 변화시키는 거대한 쓰나미가 되길 바랍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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