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복수를 통해 완성된다. 봉건시대의 그것은 개인적·임의적 응징이었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법적 판결 또는 정치적 선택을 통해 구현된다. 개인적·임의적 응징은 야만이고 범죄이지만, 판결과 선거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구현되는 합당한 복수다. 그 복수의 길이 열려야 정의가 구현된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죽어가도록 방치하고 그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으며 그 규명을 방해했던 자를 아이들의 혼령이 복수했다. 죽어간 이들을 대신해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박근혜의 도덕적·정신적 파산을 선고했다. “진정한 국가 지도자는 국가 위기의 순간에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고 피해자 및 그 가족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국민에게 어둠이 걷힐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지난 3월10일 헌재 탄핵 판결에 제출된 김이수·이진성 재판관의 보충의견이다. 두 재판관의 보충의견은 헌재 판결의 고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지도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국가 위기가 발생하여 그 상황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이를 통제·관리해야 할 국가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이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 4월16일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탄핵은 법률적 절차다. 박근혜의 세월호 참사 대응이 어떤 법률을 위반했는지 따질 수 없으므로 ‘법률적으로는’ 파면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게 헌재 다수의견이었다. 두 재판관도 여기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정의는 때로 법률 위에 있다. 그래서 두 재판관은 정의에 대해 따로 적었던 것이다.
두 재판관은 “다수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중대한 위험이 가해진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신체를 보호할 의무”가 대통령에게 있음을, 미래의 대통령과 미래의 대통령을 뽑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무대응은 박근혜가 인격 수준에서 파탄했다는 것의 증거임을 알렸다. 앞으로 이런 인물은 대통령으로 뽑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것은 과거를 청산하는 데서 나아가 미래의 새로운 잣대를 제시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갱이다. 고갱이는 식물의 두껍고 딱딱한 줄기 안에 있는 속을 말한다. 그 연약하고 부드러운 조직을 통해 양분이 전달된다. 고갱이는 모든 생명의 핵심이다. 다수의 껍질에 둘러싸인 소수의견이라 할지라도, 두 재판관의 글을 빌려 헌재는 생명을 유지하게 됐다. 헌재가 정의 구현의 기관이 될 수도 있음을 입증했다.
이 글을 적는 저녁, 어두운 바다 위로 떠오른 세월호를 텔레비전 화면으로 본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복수의 첫 장이 열린 뒤에야 참혹한 쇳덩어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밝혀내야 할 일이 더 남았지만, 여기까지 온 길이 벅차다.
헌재의 권능은 없지만, 그들의 문장에 주어진 법적 권력도 없지만, <한겨레21>은 지난 3년을 세월호와 함께하려고 애썼다. 국가 위기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고 피해자 및 그 가족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어둠이 걷힐 수 있다는 희망을 시민에게 확산시켜야 할 책무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언론에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적 복수에 힘을 보탤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작고 가냘프고 연약한 원혼들이 가득한 저 쇳덩어리 배를 차마 쳐다볼 수 없었을 것이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복수의 순간, 원통함이 사무치는 것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