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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끄나풀

1150
등록 : 2017-02-20 14:55 수정 : 2017-02-2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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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되고 얼마 뒤, 국가정보원 직원을 처음 대면했다. 간첩(정보기관 직원을 달리 뭐라 부르겠는가)의 얼굴을 보게 됐다는 생각에 설레던 기억이 난다. 한겨레신문사를 담당한다는 그는 보신탕을 사줬다. “내가 당신의 대학 선배”라고 그는 말했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오후 서너 시 무렵이었다. 그는 신문사의 일을 반말로 물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 몇 마디 대답했다. 며칠 지나 또 전화가 왔다. 역시 늦은 오후였고, 반말이었다. 그는 ‘보고서’를 마감하는 것 같았는데, 나도 기사 마감에 바빴다. 간첩의 마감을 위해 기자의 마감을 미룰 수는 없었다. “저, 지금 마감 중입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시죠.”

이후 우리 관계는 소개팅 남녀 같았다. 몇 번 더 통화했지만 나는 속을 보여주지 않았고 그는 멀어져갔다. 소개팅 남녀 사이에 흔히 빚어지는 일처럼, 미처 못한 말도 마음에 남았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왜 반말하고 지랄이야. 기자가 간첩 끄나풀로 보여?”

기자가 상종 못할 인간은 없다. 그런 대상을 정해둔 기자는 무능하다. 하물며 정보기관 직원은 언젠가 취재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말 간첩’ 이후 나는 무능한 기자의 길을 택했다. 그들과 만나면, 내 언행 전부가 보고서 재료로 쓰일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수치스럽고 더러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정원에는 <한겨레21> 담당이 있어 이 글을 볼 것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정부·공공 기관, 법원·검찰, 국회·정당, 언론·시민사회단체, 그리고 기업에 이르기까지 국내 거의 모든 조직·집단을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이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다는 게 아니다. 반세기 이상 그런 지경으로 살아온 것을 당연시하는 우리 자신이 기괴하고 끔찍하지 않은가.

영화 <타인의 삶>에는 문화예술 인사들을 감시하는 옛 동독 슈타지 요원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감시와 폭력과 불법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감시하는 자, 감시당하는 자, 감시를 목격하는 자 모두 사찰의 존재를 대기의 산소처럼 수용한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구호를 내건 슈타지는 10만 명의 요원과 20만 명의 밀고자를 부렸다. 사실상 전 국민을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이 매일 보고서를 써 올리는 한국 상황이 옛 동독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내가 일하는 곳을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이 있다는 사실에 전혀 놀라지 않는 우리는 동독 주민과 무엇이 다른가.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된 ‘블랙리스트 공작’에 국정원이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이번호에 추적보도한다. 블랙리스트의 바탕에는 개인 성향 조사가 있었다. 그 개인을 국정원이 어찌 파악했겠는가. 그가 일하는 곳을 담당한 국정원 직원이 그의 친구, 동료, 선후배를 만나 보신탕을 사주며 물었을 것이다. 국정원 직원 알아두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답했을 것이다. 그것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다져진 것이 블랙리스트다.

김완·김선식 기자의 발품 담긴 기사를 읽으며, 박근혜와 김기춘이 아니라 ‘반말 간첩’과 그 앞에 앉은 나를 떠올렸다. 사찰의 책임자와 집행자부터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일상의 곳곳에 똬리를 튼 간첩을 솎아내고 그 간첩의 끄나풀 노릇을 우리 모두 거부하기 전까지 블랙리스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어느 찰나의 순간, 나는 일상을 감시하고 성향을 파악하여 생존 기반을 허무는 국민 사찰 간첩의 끄나풀이었다. 기괴하고 끔찍하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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