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려면 작은 돌담길을 지나야 한다. 이윽고 노란 보리밭과 푸른 보리밭을 차례로 거쳐 오름에 오른다. 오름에는 말을 풀어 키우는 목장이 있는데, 망아지를 거느린 어미 말 근처에선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마침내 숲에 다다르면 시원한 향기를 풍기는 하얀 꽃, 백서향이 융단처럼 깔려 있다. 하루 종일 걸어도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숲길이다.
그날따라 나뭇잎이 우거져 그늘이 깊었고 이끼와 고사리는 촉촉했다. 숲을 파고들지 못한 봄날의 태양은 그믐달처럼 몽롱했다. 새들이 어디에 숨어 영롱하게 지저귀는지 알 길은 없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부드럽게 내 몸을 뚫었다. 노루였다.
두려움 속에 황홀했다. 그 아름다운 것은 작은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초대한 적 없는데 왜 여기 들어섰는지, 따지고 싶은 눈동자였다. 그 대답은 않고 나는 숨죽인 채 가만있었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노루와 나. 그리고 찰나의 시간.
잠들지 못하는 밤 또는 머리 쑤시는 낮이면 그 순간을 떠올린다. 생애 가장 행복하고 황홀한 순간이었다. 제주의 그 숲을 ‘곶자왈’이라 부른다. 돌(자왈)이 많은 숲(곶)이라는 뜻인데, 신비롭고 좋은 이름이다. 고사리 사이로 노루를 불러내는 주문처럼 들린다.
제주의 올레, 오름, 곶자왈 등을 처음 누비던 5~6년 전만 해도 혼자인 탐방객이 많았고, 혼자 오는 이의 대부분은 여자였다. 확실히 남자보다 여자가 힐링의 공간을 잘 찾아오는구나,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은 다르다. 통계적 근거는 없으나 깊이 체감한다. 가끔 제주의 길을 걸어보면 여성 탐방객이 눈에 띄게 줄었다. 혼자 걷는 여성은 거의 없고, 둘셋이 뭉쳐 다니는 일도 드물다. 2012년 7월, 올레길을 홀로 걷던 여성이 어느 남성에게 죽임당한 일이 고비였던 것 같다. 네티즌들의 블로그 등에도 경고의 내용이 있다. ‘곶자왈에는 여자 혼자 들어가지 마세요.’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그녀의 마지막 시간이다. 그녀는 즐거웠을 것이다.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며 웃었을 것이다. 복잡한 일을 잠시 잊고 맛있는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했을 것이다. 노래방에서 무슨 곡을 부를까 즐거운 고민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소소한 행복이다. 그 행복을 누리다가 그녀는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행복의 부당한 박탈을 알리는 사건이다. 올레길에서 여성이 죽자 한국의 여성은 올레의 행복을 포기했다. 이제 도심 노래방 화장실에서 죽었다. 한국의 여성은 도심 속 작은 행복조차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그들은 친구들과 수다 섞으며 웃다가 화장실에서 잠시 옷매무새를 고칠 자유를 빼앗겼고, 출퇴근 버스와 지하철에서 음악 들으며 잠시 눈 붙일 수 있는 자유를 빼앗겼으며, 고즈넉하게 혼자 걸어야 제맛인 곶자왈에서 노루를 조우하여 감동으로 긴장하는 행복을 누릴 자유까지 빼앗겼다.
이제야 알겠다. 곶자왈에서 누린 나의 행복은 ‘정의의 부재’에 기초했다. 그 행복을 세상의 절반, 여성은 누릴 수가 없다. 이것은 사람 사는 일의 정의에 대한 것이다. 자연과 문명의 아름다움을, 삶의 곳곳에서 펼쳐지는 작은 행복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릴 수 없다면, 이 나라는 정의롭지 않다. 그런 나라의 남자들은 정당하지 않다. 그 남자들의 행복은 오직 기괴할 뿐이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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