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백
등록 : 2016-03-14 15:31 수정 :
얼마 전, 난생처음 사주라는 것을 보았다. 편집장 노릇 1년을 기념하는 작은 선물을 스스로 챙겨주고 싶었다.
‘나의 운명은 내가 읽는 것’(제1098호) 기사를 읽은 것도 계기가 됐다.
나무의 기운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했다. 나무로 종이를 만들고 그 종이에 글을 쓰는 것이니, 글 쓰는 일이 어울린다고 했다. 파괴·충동과 정교·세심, 두 극단의 기운을 함께 품고 있다고 했다. 새 질서를 만들고 싶어 하며, 마음속에 어둠이 있다고 했다. 내면의 힘이 강하므로 이를 적절히 분출시키라고 명리학자는 말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숲을 가까이하면 좋다”고 했다. 혼자 숲길 거니는 것이 왜 그리 좋은지, 숲에 갈 때마다 홀연 머물고 싶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온통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나무, 그리고 숲에 깃들 팔자였던 것이다.
숲 가운데도 편백나무 숲을 가장 좋아한다. 제주 사려니숲길이나 서귀포 자연휴양림에 그 나무들이 있다. 이 길을 열심히 달린다 해도 저 너머 다리가 끊어져 있을 거라는 두려움이 일 때마다 제주를 찾았다. 침엽수인데도 잎이 부드러운 그 나무는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온몸을 흔든다. 아이처럼 반기는 편백의 향기 속을 걸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것은 묘한 일이다. 꽃의 향기는 벌과 나비를 꾀려는 유혹의 페로몬이다. 그 향기가 좋은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반면 나무의 향기(피톤치드)는 살균·살충을 위한 화학물질이다. 공격의 물질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인간이 진화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무취한 나무 향기에 빠져든 것에 나는 깊은 안도를 느낀다.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절과 함께 꽃은 오고 가지만, 나무는 늘 거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지키며 묵묵히 서 있으려는 존재의 향기, 더러운 것을 멸하여 깨끗하게 오래 서 있으려는 향기.
활엽보다는 침엽이, 침엽 가운데도 편백이 가장 많은 피톤치드를 내뿜는다. 옛날 사람들은 ‘불의 나무’(히노키)라 불린 그 나무를 비벼 불꽃을 피웠다. 나중에는 그 향기를 귀하게 여겨 건축 자재로 썼다. 오늘날엔 위안이 필요한 이들이 아로마 용품으로 쓴다.
마지막으로 편백숲을 걸어본 일이 아득한데 <한겨레21>이 어느새 창간 22주년을 맞았다. 우리는 이런저런 짓을 1년 동안 쉼없이 저질렀다. 여러 취재팀을 없애고 보탰다. 디지털팀을 새로 만들었다. 지면을 수시로 바꾸었다. 겁도 없이 1년짜리 탐사보도를 시작했다. 카카오몰에서 인쇄매체를 팔고, 후원금을 모아 젊은이들에게 무료로 배송했다. 이 작은 매체가 신문·방송보다 소중한 이유, 이 매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를 입증하고 싶었다. 간혹 격려와 칭찬을 들었으나 갈 길이 멀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매체가 편백의 향기를 내뿜는 일이다. 내면 가득한 불기운을 다독이면서, 주변의 삿된 것을 일일이 박멸하는 섬세함으로, 모든 이에게 오랫동안 위로와 평화를 주는 나무가 되는 일이다. 대다수 언론이 꽃의 향기로 유혹하는 가운데서도 지긋한 나무의 향기로 진짜 독자를 불러모으는 좋은 언론이 되어 이 숲을 지키는 일이다.
추신. 이번호부터 글자 크기를 키우고 편집 디자인을 바꿨다. 부디 마음에 드시기를 소망한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카카오톡에서 <한겨레21>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