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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할머니 없는 첫 추석, 할머니 생각을 한참 했어요”

독자가 그린 얼굴 공모‘연필로 그린 사랑’당첨자 발표… 완성도보다 그림을 그린 대상과 나눈 교감에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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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12 21:44 수정 : 2015-10-1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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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얼굴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동안 “행복했고”, “눈물이 났다”는 이가 많았다. 한 응모자는 “동생의 눈을 바라보며 그리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고 했다. 가까운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할 만큼 우리가 빠듯하게 생활하고 있어서다. 얼굴을 그리며 남편이 될 남자친구의 “코가 크고, 턱선이 굴곡졌다는 것을 (다시) 유심히 보게 됐다”는 이도 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듯 하나씩 찬찬히 살피며 살아가려 한다”는 글을 함께 보내왔다.

<한겨레21>이 지난 추석 연휴 기간에 ‘연필로 그린 사랑’이란 작은 공모전을 진행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에 쌓인 시간과 감정을 다시 마주하며 이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고, 이를 그림으로 말하는 시간이다. 공모 기간(9월29일까지)이 일주일 정도로 짧았지만 50점이 도착했다.

“내가 이렇게 생긴 줄 몰랐다”며 자신의 얼굴을 그린 한 응모자는 “나를 그리며 지금의 힘든 시절, 상황, 현실을 한가위 하늘의 달 속에 맡기고 잠시나마 평안함을 누렸다. 가끔 (얼굴을) 그려야겠다”는 글을 전해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자화상은 이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9살 남동생을 그린 12살 누나의 그림을 엄마가 대신 보내기도 했다. 엄마는 “요즘 들어 부쩍 다투는데 누나가 그림을 그려준다니까 얌전히 앉아 있네요.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먹보대장 동생’이란 제목의 그 그림에선 자기를 어떻게 그려줄지 기대하는 동생의 눈동자와 그런 남매를 바라보며 웃음지었을 엄마의 행복감이 동시에 엿보였다.

할머니, 엄마, 아빠, 남편, 딸과 아들, 동생, 손주, 조카 등 그림의 대상이 다양했다. 특히 엄마는 잠자는 엄마, 빨래 개는 엄마, 벌레에 물린 엄마, 파마하는 엄마,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으로 고루 등장했다. 아내를 그린 남편의 응모만 없었던 것이 신기한 부분이었다.

<한겨레21>은 응모작 가운데 선물(한화아쿠아플라넷 빅5 이용권)을 받을 5명을 골랐다. 추석을 맞아 얼굴을 그려보자는 취지였으므로 과거에 그린 그림들은 아쉽지만 선정 과정에서 제외했다. 선정작보다 수준이 뛰어난 그림도 많았지만 완성도보다 그림을 그린 대상과 나눈 교감에 주목했다.

이슬비씨의 그림에선 손녀의 그리움이 느껴졌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할머니 사진을 보면서 손녀의 사랑을 종이에 옮겨놓았다. 그는 “눈을 마주치며 그릴 수는 없었지만 꼭 그리고 싶은 사람이 떠올라 사진을 보고 그렸다”고 했다. “할머니는 올해 4월에 돌아가셨어요. 노환이셨고 다들 호상이라고 하지만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첫 추석이 허전하네요. 그림을 그리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할머니 생각을 한참 했어요”라는 글을 함께 보냈다.


6살 손자를 그린 할머니의 그림도 있었다. 할머니는 “부끄러워하는 미소가 너무 귀여워 그려봤다”는데, 손자는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 미소를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으로 이가 빠진 6살의 모습을 남겨준 할머니의 마음이 훗날 손자에게도 좋은 선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파마하는 엄마를 그린 그림에선 두 딸과 엄마가 함께 누렸을 그 시간의 행복이 묻어났다. “미용하는 동생이 시험 삼아 어머니의 머리로 파마 연습”을 했고, “노곤하셨는지 엄마가 눈을 감고 졸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한 장애학생의 웃음도 그림에 담겼다. 응모자는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돕는 일을 한다. 이 그림은 “시소에 빠져 흠뻑 즐거워하는” 아이의 얼굴이다. 아이의 웃음 뒤엔 “입학 전까지 줄곧 투병한 세월의 무게가 자리잡고 있다”고 응모자는 설명했다. 그는 “나는 이 아이가 좋아요. 맘껏 뛰어노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전했다.

‘사랑하는 청춘’의 그림도 있었다. 이제 막 직장을 잡은 연인은 야근이 많아 주말에 겨우 볼 정도고, 그마저 카페에서 일에 관련된 책과 자료를 보거나 잔무를 처리할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카페에서 일에 필요한 책을 보는 여자친구를 그린 것이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시간도 없이 흘러가고, 사진으로 찍어도 다시 볼 시간이 없는 요즘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숨 쉴 틈이 돼주었습니다. 그림을 다 그리고선 상대방이 환하게 웃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이 따뜻해 보이고, 행복하다면서요. (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너를 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은 그러하다. 상대와 교감하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2012년에 그린 그림이라 선정작에서 빠졌지만, 여동생이 남자친구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대신 보낸 언니의 이야기에서 그런 마음이 전해졌다.

“우리 집에서 남자친구와 결혼을 반대하기도 해서 오랫동안 (동생이 그 친구와) 연애만 하고 있다”고 소개한 언니는 “동생의 수첩에 남자친구를 그린 그림을 보니 동생의 시선에는 ‘이 친구가 이렇게 느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애틋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남자친구의 웃는 얼굴을 그린 그림에 여동생은 이런 마음을 적어놓았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당신 표정이야. 항상 이렇게 웃으면 좋겠다. -당신의 애인.’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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