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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벗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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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12 17:22 수정 : 2015-10-1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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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4일 김학용 새누리당 의원은 포털의 선정적 편집의 대표 사례로 <한겨레21>의 추적 탐사보도 ‘죽으면 끝날까’(제1077호)를 꼽았다. 분석 기준·범주 구분·표본 추출 등이 두루 잘못된 주장이었다(관련 기사 ‘그의 통계가 악마의 편집’ 참조), 그래도 정신이 번쩍 났다. 졸다가 죽비 맞은 기분이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비서실장인 그가 우리의 화두를 풀어주신 게 아닌가. 야동을 비판하려면 포르노의 자세가 필요한 것임을 일깨워주셨다.

그 신묘한 기술을 체득한다면, 창피 줘버리겠다는 앙심을 품고, 부패 척결 따위 대의를 내거는 건 잊지 않고, 새누리당 의원들을 분석하는 모양새를 취한 뒤, 정확성·엄밀성은 대충 넘어가면서, 집권여당 대표 비서실장이 소속 의원들 관리도 못한다고 부르대는, ‘부패 정치 방치하는 김학용 의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좋은 가르침을 받고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선정성이란 게 그리 간단치 않은 개념인 것이다.

선정언론의 대표 격은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페니페이퍼’다. 유명인 스캔들을 보도하고, 엽기적 사건·사고를 보도했다. 그런 보도를 하게 된 연유가 있다. 그 전까지 모든 언론은 ‘정파언론’이었다. 유력 정치인이 직접 신문을 발행하여 입맛에 맞는 주장만 실었다. 그런 정치적 후견을 끊겠다는 기자들이 페니페이퍼를 만들었다. 정치인 사장의 비위 맞추는 기사를 쓰느니, 가난한 시민의 눈높이로 기사 쓰면서 1페니씩만 받겠다(그래서 페니페이퍼다)는 발상의 전환이 낳은 언론이었다.

장삿속이 곧 죄악인 것은 아니다. 상업언론은 사상 처음으로 대중언론의 시대를 열었다. 그들의 정치 스캔들 보도는 (당시로선 최신의) 권력 고발이었고, 사건·사고 보도는 (언론이 도대체 다루지 않던) 서민의 이야기였다.

예컨대 선정보도를 대표하는 페니페이퍼로 <뉴욕월드>가 있는데, 그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는 정확성·정직성을 신조 삼아 사실에 입각한 품격 있는 비판을 강조했다. 그가 정말 ‘악마적 선정보도’만 자행했다면 그를 기리는 ‘퓰리처상’이 어찌 최고 언론의 표상이 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선정성이라는 개념에는 정파에 기대지 않고 대중과 밀착하려던 근대 언론의 노력이 녹아 있다. 그 지향만큼은 오늘 한국에서 여전히 귀하다. 권력이 아니라 시민에 밀착하려는 언론이 지금 우리 곁에 어디 있는가.

언론학자들은 “말초적 감정을 자극하면서 지엽적 성·폭력·스캔들 등을 보도하는 것”을 선정보도라고 정의 내린다. 즉, 자극성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떤 내용을 담아 자극했는지까지 살펴야 ‘나쁜 선정성’을 가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효리, 벗었다’는 제목을 달고 여가수가 공연 중 양말 벗은 이야기를 보도하는 뻔뻔함은 갖춰야 진짜 선정보도다.


그런 구분 없이 싸잡아 선정성이라 몰아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긴 하다. 언론이 대중과 만나려 들지 않아도 되는, 정치적 후견 시절의 정파언론으로 회귀시키면 된다.

유서 깊은 성공모델도 있다. 3·1 만세운동 전후 필부들이 만든 지하언론을 억압하려고 일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창간을 조직했다. 해방 직후 주류를 차지한 중도·좌파 언론을 밀어내려고 미군정은 두 신문의 복간을 도왔다. 군사정권은 눈엣가시 같은 언론들을 폐간하고 두 신문에 온갖 특혜를 제공했다. 급기야 이명박 정부는 신문시장이 어렵다고 방송 진출까지 허락했다. 그것은 정치적 후견의 역사다. 게다가 그들은 말초를 자극하는 기사를 잘도 쓴다.

정치적 후견 없이 홀로 선 <한겨레21>은 어떻게 대중을 자극할 것인가. 확 벗어버릴까? 가르침을 받았으나 깨달음이 멀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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