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에는 <한겨레21> 제823호(2010년 8월13일)에 실린 졸문 ‘십팔 방위’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나는 단기 근무 사병 출신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나한테 자꾸 욕을 했다. “어이, 십팔~방.”
18개월 근무를 시작한 1994년 여름, 고향 대구는 기다렸다는 듯, 최고 더위로 인사했다. 역대 최고기온은 1942년 8월1일 대구의 40℃다. 그런데 1994년 7월21일 대구는 39.4℃까지 올랐다. 볼품없는 민무늬 군복에는 땀이 증발되어 남은 ‘소금선’이 나이테처럼 쌓였다.
나는 부대에서 부대로 군 문서를 전달하는 전령 노릇도 했다. 어느 날 부대로 돌아오다가 중국식당에 갔다. 군복에 또 한줄 소금선을 남기며 자장면을 먹는데, 텔레비전에 긴급 속보가 떴다. 1994년 7월9일 낮 12시, 북한 당국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그것은 부음이 아니라 전쟁에 대한 보도였다.
유사시 곧장 최전선에 투입되어 적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하는(싸우는 게 아니라) ‘총알받이’가 우리 임무라는 게 대구 십팔방들의 상식이었다. 전쟁 나모 시발 우리 씨팔방은 비행기 타고 가서 금세 뒤지는기라, 십팔방들은 수군댔다. 그 상식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 알 수 없었지만, 방송에선 “전군이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갔다”고 했다.
땀 흐르는 팔뚝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는 오랫동안 자장면을 먹었다. 면발을 하나씩 집어올려 천천히 씹었다. 그대로 평생 자장면을 먹고 싶었다. 부대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 목숨 따위 개의치 않는 살육의 한복판에 끌려 들어가기 싫었다.
최근 남북 긴장 국면에서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다짐한 청년들을 보수 언론이 많이 보도했다. 그들이 청년 전체를 대표하진 않을 것이다. 언론의 과잉 보도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건 그들의 용기는 소시민적 이기주의보다 나을 것이다.
그래도 그 젊은 결기에 고개가 갸웃한다. 폭력은 전이된다. 폭력 피해자는 누군가에게 그 폭력을 투사한다. 아버지에게 매질당한 아들이 자라서 제 아내를 폭행하는 식이다. 지금 일부 젊은이들이 북한에 투사하려는 폭력은 언제 누구로부터 전이되어 얼마나 오랫동안 그 내면에서 꿈틀댔던 것일까.
야만적 인간(국가)은 항상 폭력의 전이 대상을 찾는다. 이민족·이교도·소수자·약자 등에게 폭력을 발산하려 혈안이다. 바로 그 때문에 폭력은 자아(내정)의 흠결을 감추고 억압하는 구실을 한다. 반면 문명의 인간(국가)은 폭력의 투사를 멈춘다. 자신에게 전이된 폭력의 에너지를 삭이고 다스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투사되지 않도록 관리한다. 폭력(전쟁) 대신 대화와 협력을 택한다. 동족의 젊은이를 야비하게 린치하는 공격을 도모한 북한은 야만의 나라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그들보다 문명화된 국가라면, 그 위협에 폭력으로 대응하겠다는 정부 강경파와 일부 젊은이들의 선언이 공중파 방송·주류 신문·인터넷을 통해 온 나라에 메아리쳐서는 안 된다. 다스리지 않는 폭력의 에너지를 마구 투사해선 안 되고, 이를 부추겨서도 안 된다.
군대 간 폭력이 시작되면, 폭력의 투사는 모두를 향해 진행된다.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만이 아니다. 그 전쟁의 진정한 교훈은 전선 후방에서도 살인·테러·린치·성폭력이 일상화되는 지옥을 모든 사람이 몇 년 동안 겪었다는 데 있다. 그 일을 정말 다시 치르고 싶은가.
전쟁이 두렵다고, 개인의 존엄을 개의치 않는 살육에 반대한다고 발언하는 청년들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요즘 고민에 빠졌다. 호전의 청년이 있다면 반전의 청년도 있어야 옳지 않겠는가. 누가 이들로 하여금 폭력을 갈구하게 만들었는가. 덥지만 소름 돋는 오싹한 여름은 왜 자꾸만 반복되는 것인가.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야만적 인간(국가)은 항상 폭력의 전이 대상을 찾는다. 이민족·이교도·소수자·약자 등에게 폭력을 발산하려 혈안이다. 바로 그 때문에 폭력은 자아(내정)의 흠결을 감추고 억압하는 구실을 한다. 반면 문명의 인간(국가)은 폭력의 투사를 멈춘다. 자신에게 전이된 폭력의 에너지를 삭이고 다스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투사되지 않도록 관리한다. 폭력(전쟁) 대신 대화와 협력을 택한다. 동족의 젊은이를 야비하게 린치하는 공격을 도모한 북한은 야만의 나라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그들보다 문명화된 국가라면, 그 위협에 폭력으로 대응하겠다는 정부 강경파와 일부 젊은이들의 선언이 공중파 방송·주류 신문·인터넷을 통해 온 나라에 메아리쳐서는 안 된다. 다스리지 않는 폭력의 에너지를 마구 투사해선 안 되고, 이를 부추겨서도 안 된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