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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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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20 15:47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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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은 둥지이자 감옥이다.

20여 년 전, 세상을 읽는 나의 텍스트는 마르크스와 연애와 데모였다. 이제는 멀어졌지만 한때 그것들은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랬던 천둥벌거숭이가 이젠 이름을 걸고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글을 사람들 앞에 내놓는다. <한겨레21>이 아니었다면 턱도 없었을 일이다. 이 둥지에서 제대로 세상 보는 법을 배웠다.

동시에 그것은 애초부터 감옥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일을 억지로 치러내느라 기자의 첫날부터 지금까지 오장이 욱신거린다. 그래도 연명에 필요한 재화를 받았으니 그 값만큼 일해야 한다고 악을 쓰며 깡으로 버텼다.

악과 깡은 아주 해롭다. 하고 싶은 일, 쓰고 싶은 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도모해도 삶이 빈한할 터인데 세상과 악다구니하느라 아주 죽을 지경이다. 족쇄를 끊자, 이제 좀 죽어가지 말고 살아가보자, 이빨 꽉 물고 생각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다.

조직은 생물이다. 특히 무리지어 다니는 짐승이다. 배타적으로 무리짓는 연유는 ‘종의 보존’에 있다. 보존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자문하지는 않는다. 생태계 전체를 해치는 번식이라도 아랑곳 않는다. 대다수 조직은 그저 살아남는 데 모든 에너지를 바친다.

언론사도 조직이다. 왜 그런 기사를 쓰면서 버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언론사가 별처럼 많다. 한국 언론의 상당수는 무가치적 생존 본능에 긴박당해 있다. 그 지경이 되면 기자 노릇을 배운 둥지가 기자 노릇을 막아서는 감옥이 된다. 기자 노릇의 근본은 진실 추구다. 조직 논리와 매체이기주의가 횡행한다면 진실 추구는 개별 언론사 바깥에 있다.

그럴 때 어떤 기자들은 소속 매체를 박차고 나온다. 정치인 부패를 추적 취재하던 <애리조나 리퍼블릭>의 돈 볼스 기자가 1976년 6월 의문의 차량 폭발 사고로 사망하자, 20여 개 언론사 30여 명의 기자가 휴가를 내거나 사표를 던지고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깃발 아래 후속 취재를 이어갔고, 그 결과를 여러 매체에 수십 차례 보도했다.


매체 경계를 넘어 진실을 추적하려는 매체가 한국에도 있다. <뉴스타파>다. 탐사보도에 신명을 바치려는 40여 명이 모여 있다. 해직된 이도 있지만 스스로 그만두고 나온 이가 더 많다. 옛 소속은 KBS, MBC, YTN, OBS, 동아일보, 국민일보 등을 망라한다. 3만5천여 명의 후원금만으로 운영된다.

“수익을 내자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기사에 대한) 인터넷 클릭 수를 높여본들 뭘 하겠습니까. 제대로 보도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요.” 얼마 전 <뉴스타파> 사무실을 찾았을 때, 국가정보원 도·감청 사건을 취재하던 최기훈 에디터가 말했다. 그 정신은 곳곳에 새겨져 있다. 사무실 입구에는 리영희, 회의실 입구에는 송건호의 대형 사진이 있다. 한겨레신문사의 창립 정신이 그들에게도 흐른다.

그리고 우리는 손잡았다. 국정원 도·감청 사건을 <뉴스타파>와 <한겨레21>이 함께 취재한다. 서로 다른 언론사가 하나의 사안을 공동취재하는 것은 국내 처음이다. 각자의 조직 논리를 타파하고 국정원 도·감청 사태를 함께 파고들어볼 작정이다. 이번 취재가 일단락되면 이다음, 그다음의 공동취재를 이어갈 것이다. 그때의 공동취재는 이번보다 더 멋질 것이다.

족쇄를 깨뜨리고 경계를 허물면, 무엇을 위해 기자 노릇 하는지 자문하면, 감옥이었던 조직을 더 큰 둥지로 바꿀 수 있다. 넓은 둥지에서 계속 탐사보도하겠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추신. <한겨레21> 홈페이지(http://h21.hani.co.kr)를 당분간 ‘국정원 도·감청 의혹’ 기사로만 채운다. 맥락 위에 잘 정돈된 촘촘한 사실의 기록으로 이 둥지를 꾸미겠다. 모든 관련 기사를 한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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