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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다시 뉴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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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16 18:37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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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3월, 목련이 가장 먼저 피었는지, 진달래가 흐드러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앞선 겨울, 대학교지 편집장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닥쳐올 시간이 두렵고 지나온 시절만 그리웠다. 휴가를 받아 교지 편집실을 찾았다. 마음보다 몸으로 기억해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새 주간지 창간호를 읽고 있었다. 텁텁하고 매캐한 편집실 공기를 마시며 덩달아 읽었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기자가 되면 어떨까.’ 어린 시절 접했던, 전설의 매거진 <뿌리 깊은 나무> 이래 어느 매체에 매혹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영혼이 흔들리던 1994년 봄날, 목련과 진달래 대신 <한겨레21>을 마음에 각인했다.

한 사람의 독자를 단박에 사로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몸서리치며 뛰어다녔는지 나중에야 알게 됐다. 한겨레신문사 입사 이후, 이 매체의 역사를 집필할 기회가 있었다(<희망으로 가는 길-한겨레 20년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2008년 출간됐다). 창간 주역들을 만나고 해묵은 자료철을 뒤졌다. 신문사를 일군 1970~80년대 해직기자들은 결핍과 갈망으로 몸부림쳤고, 자존을 되찾을 영롱한 매체를 만들지 않으면 금세 고꾸라질 것 같은 절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해직기자) 집단의 운동 이전에 (상처 입은) 개인의 생존이었다. 실존의 절박함이 최고, 최초, 혁신의 언론을 꿈꾸게 만들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옛 매체가 되어가는 신문 대신 매거진에 눈을 돌렸다. 혁신 언론의 꿈은 1994년 이후 <한겨레21>에 더욱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1994년 1월1일, 새 주간지 창간을 알리는 <한겨레> 1면 ‘알림’ 기사에는 피를 달구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21세기를 향한 뉴저널리즘 선언- 새로운 저널리즘의 기수로 우뚝 서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세 차례에 걸쳐 등장한 뉴저널리즘 가운데 어느 것을 염두에 뒀건, 21년 전 뉴저널리즘 선언은 여전히 새롭다.

뉴저널리즘의 첫 번째는 1830~50년대 ‘대중언론’이다. 조지프 퓰리처는 <뉴욕월드>의 기사 성격과 편집 방식을 혁신해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갔다. 두 번째는 1920~30년대 ‘과학언론’ 또는 ‘객관언론’이다. <뉴욕타임스>의 정치평론가 월터 리프먼은 과학적 엄밀함으로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 보도할 것을 주창했다. 세 번째 뉴저널리즘은 1970년대 ‘문학언론’이다. <뉴요커>의 문화평론가 톰 울프는 일상을 사실적으로 헤집어 대중과 교감을 높이는 문학에서 언론의 미래를 찾았다.

오늘 한국의 대다수 기자들은 미래를 가늠하지 못해 쉼없이 흔들리는 영혼을 품고 산다.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기자들이 해직됐거니와, 칼날을 피한 다른 기자들은 ‘기레기’로 불리며 대중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 기자의 자존은 궁지에 몰려 있다.

이런 봄에도 꽃은 과연 피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가운데, 2008~2010년 무렵 일했던 곳에 돌아왔다. 마음보다 몸으로 기억해둔 사람들이 이곳에 있다. 그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 있다. 다시 뉴저널리즘이다. 다시 대중언론, 과학언론, 문학언론이다.


이번호에도 창간 21주년 기념 특집 기사들을 실었다. 엄지원 기자는 북-중 접경지역을 누볐다. 민족·국가의 경계를 허무는 사람들을 만났다. 황예랑 기자는 비정규직 호명의 효과를 분석했다. 함부로 부르는 이름이 곧 낙인이다. 박현정·정은주·송호진 기자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사건의 발단과 결말을 교직했다. 김기종이 광인이라면, 사찰의 권력은 광기를 숙주 삼은 괴물이다. 그런 권력과 긴장하며 사실을 장악하여 대중과 교감하는 것. 우리가 이 생을 견뎌내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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