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체육은 제대로 된 운동장부터
이번호 과학면 ‘이종찬의 건강 바로읽기’는 비록 짧은 글이었지만 제게는 그 무엇보다도 와닿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업무차 대만으로 출장을 많이 다닙니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대만 중소도시의 시골 근처고요. 사회체육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 시골에도 400m 트랙이 우레탄으로 깔린, 그리고 중앙에는 잔디로 된 축구장이 있는 그런 운동장이 있습니다. 물론 주변은 나무 숲으로 되어 있고요. 한국에서는 전혀 못했던 운동을 이곳 대만에 와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뛸 수 있는 운동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서울 집 근처 대학교 운동장에 갈 수도 있지만 조깅을 할라치면 흙바닥으로 된 운동장의 먼지를 고스란히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로 공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회체육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듭니다. 동네 근처에 많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이렇게 운동장 하나 제대로만 마련해주면 다들 아침에 조깅하고 산보하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체육을 통한 건강유지 및 향상이라는 숙제가 풀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주한/ 인터넷 독자
덕만이네의 훈훈한 삶 풀뿌리 통신 ‘자연을 닮은 사람이 산다네’는 참 정겨운 기사였습니다. 피를 나누지 않은 남남인 김광철씨와 김희덕씨가 한집살이를 하며 오순도순 산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들의 ‘환경친화적’인 삶이 더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삶의 스승은 자연이다”라는 말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참 각박한 세태입니다. 정치권에서는 연일 비리가 폭로되고 경제는 경제대로 침체일로입니다. 그래도 삶은 아름다워야 하지요. 덕만이네가 사는 풍경은 너무 단순해서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물론 모든 사람이 덕만이네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 수는 없겠지만 속도에 치여 살다가도 이런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갑자기 마음이 훈훈해지고, 어린 시절 고향이 생각납니다. 정인수/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단어 사용 하나도 조심! 문화면 ‘현실문화연구의 파격적 도전’을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기사 잘 읽고 이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글 맞춤법에 있어서 한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말의 ‘전혀’라는 단어는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는데 뒤에 부정어가 호응이 되어 쓰여 ‘전적으로’, ‘도무지’, ‘조금도’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 경우의 한자는 ‘全’입니다. 다른 하나는 ‘專’으로서 ‘오직’, ‘오로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54쪽의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런 변화는 전혀 새로운 흐름이었다”라는 문장에서는 ‘전적으로’라는 의미인데 이 경우 부정어와 호응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작은 것에도 신경쓰는 <한겨레21>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진호/ 인터넷 독자 기독교 비판에 대한 공감과 유감 ‘하나님과 알라는 다른 존재인가’를 읽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한겨레21>의 논지에서 부정적인 결론를 내릴 수밖에 없는 일들을 기독교가 해왔습니다. 십자군 전쟁 역시 아랍 세계를 향한 고통의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십자군, 19세기 침략의 전쟁은 결코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자들입니다. 또 기사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알라는 아랍인, 한국인은 하나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비교종교학의 상식”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저는 성경무오설을 믿는 사람입니다. 사실 성경무오설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배타성이 다른 종교와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의 기독교의 문제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악마와 같이 취급한다는 것이며,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행한 정치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저는 이런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지금의 미국의 행위는 결코 성경의 기독교가 아닙니다. 인터넷 독자 독자만화
덕만이네의 훈훈한 삶 풀뿌리 통신 ‘자연을 닮은 사람이 산다네’는 참 정겨운 기사였습니다. 피를 나누지 않은 남남인 김광철씨와 김희덕씨가 한집살이를 하며 오순도순 산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들의 ‘환경친화적’인 삶이 더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삶의 스승은 자연이다”라는 말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참 각박한 세태입니다. 정치권에서는 연일 비리가 폭로되고 경제는 경제대로 침체일로입니다. 그래도 삶은 아름다워야 하지요. 덕만이네가 사는 풍경은 너무 단순해서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물론 모든 사람이 덕만이네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 수는 없겠지만 속도에 치여 살다가도 이런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갑자기 마음이 훈훈해지고, 어린 시절 고향이 생각납니다. 정인수/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단어 사용 하나도 조심! 문화면 ‘현실문화연구의 파격적 도전’을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기사 잘 읽고 이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글 맞춤법에 있어서 한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말의 ‘전혀’라는 단어는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는데 뒤에 부정어가 호응이 되어 쓰여 ‘전적으로’, ‘도무지’, ‘조금도’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 경우의 한자는 ‘全’입니다. 다른 하나는 ‘專’으로서 ‘오직’, ‘오로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54쪽의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런 변화는 전혀 새로운 흐름이었다”라는 문장에서는 ‘전적으로’라는 의미인데 이 경우 부정어와 호응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작은 것에도 신경쓰는 <한겨레21>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진호/ 인터넷 독자 기독교 비판에 대한 공감과 유감 ‘하나님과 알라는 다른 존재인가’를 읽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한겨레21>의 논지에서 부정적인 결론를 내릴 수밖에 없는 일들을 기독교가 해왔습니다. 십자군 전쟁 역시 아랍 세계를 향한 고통의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십자군, 19세기 침략의 전쟁은 결코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자들입니다. 또 기사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알라는 아랍인, 한국인은 하나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비교종교학의 상식”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저는 성경무오설을 믿는 사람입니다. 사실 성경무오설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배타성이 다른 종교와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의 기독교의 문제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악마와 같이 취급한다는 것이며,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행한 정치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저는 이런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지금의 미국의 행위는 결코 성경의 기독교가 아닙니다. 인터넷 독자 독자만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