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슬기 ‘의자놀이’ 슬픈 논쟁 <의자놀이>, 책의 내용은 참 인상적이다. 소외된 자들의 아픔과 그들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게 된다. 그렇지만 ‘크로스- 이주의 트윗’에 나온 의자놀이 논쟁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커진다. 누구도 배제당하지 않는 사회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무엇이 옳은지 하나씩 따져보기도 지친다. 끊임없이 약자들이 배제당하는 사회에 질려서일까? 슬픈 논쟁이다. 이정주 1천 년을 되돌리고 싶었던 것일까 현대 국가에서 개개인은 추상적인 사회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권리를 일정 부분 국가에 위임한다. 그로써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굳이 루소와 칸트의 진부한 이론을 꺼내들지 않아도 사회계약론은 근대 이후의 상식이었다.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를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지금 이 정권은 단순히 잃어버린 10년이 아닌 1천 년 정도를 되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공정한 사법제도를 통해서만 폭력은 용인된다. 사설 폭력이 난무하고 또 그것을 방관하는 정부. 상식이 무너진 이 시대의 종점은 ‘만인의 투쟁’인가?
장슬기 ‘의자놀이’ 슬픈 논쟁 <의자놀이>, 책의 내용은 참 인상적이다. 소외된 자들의 아픔과 그들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게 된다. 그렇지만 ‘크로스- 이주의 트윗’에 나온 의자놀이 논쟁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커진다. 누구도 배제당하지 않는 사회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무엇이 옳은지 하나씩 따져보기도 지친다. 끊임없이 약자들이 배제당하는 사회에 질려서일까? 슬픈 논쟁이다. 이정주 1천 년을 되돌리고 싶었던 것일까 현대 국가에서 개개인은 추상적인 사회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권리를 일정 부분 국가에 위임한다. 그로써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굳이 루소와 칸트의 진부한 이론을 꺼내들지 않아도 사회계약론은 근대 이후의 상식이었다.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를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지금 이 정권은 단순히 잃어버린 10년이 아닌 1천 년 정도를 되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공정한 사법제도를 통해서만 폭력은 용인된다. 사설 폭력이 난무하고 또 그것을 방관하는 정부. 상식이 무너진 이 시대의 종점은 ‘만인의 투쟁’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