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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내 서른을 감싸준 비디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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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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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독자/ ‘영화사랑’ 주인 남용식씨

가게의 단골이었던 학생이 <조선일보> 기자가 돼 돌아와 “우리나라 국시는 반공 아닌가요?”라고 되묻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던 한 비디오방 주인. 그는 독자편지에서 가게 입구에 ‘조선일보를 반대한다’고 써붙이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바로 그 ‘문제의 독자’를 찾아 신림동으로 갔다. 자그마한 비디오방 입구에는 예상대로 ‘조선일보 반대’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영화사랑’(02-889-6853)에는 다른 비디오방에는 반드시 있는 게 없고, 없는 게 있다. 그곳엔 온갖 패러디 제목으로 상품성을 자랑하는 에로비디오가 없다. 대신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든 고전과 다큐멘터리가 즐비하다. 전시된 비디오테이프는 작가별, 주제별로 세심하게 분류돼 있다. 도대체 이렇게 돈벌기 싫어하는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오랫동안 구애해온 사람에게 허락받은 느낌이었어요.” 기자와 처음 통화했을 때 남용식(38)씨는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창간호부터 줄기차게 읽어왔던 그로서는 잡지가 자신을 찾아주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나보다. “파출소장 어머니 고발사건이나 30대 유부녀 원조교제사건이 제일 인상 깊어요. 그 기사를 보지 않았으면 진실을 몰랐을 겁니다. 이면의 진실을 파헤쳐주는 것이 <한겨레21>의 가장 큰 장점이에요.” 이것이 그가 지금까지 잡지를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대학을 나와 멀쩡하게 직장 잘 다니던 남씨가 갑자기 비디오방을 차리기로 결심한 것은 93년. 그냥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비디오방이 학생이나 고시생에게 문화적 혜택을 줄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몇몇 비디오방의 퇴폐영업을 문제삼아 당국이 영업을 금지시켰다. 그해 연말연시를 그는 명동성당에서 단식하면서 보냈다. 결국 어렵게 영업허가를 얻었으나 문제는 계속됐다. 갑자기 퇴폐적인 비디오방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긴 것이다. “그땐 정말 힘들었어요. 싸움은 우리가 했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이득을 챙긴 꼴이죠.” 하도 답답해서 친하게 지냈던 학생에게 정말 우리가 제대로 된 비디오방을 할 수 있을지 물어봤다. 그 학생의 대답이 남씨를 다시 일으켜세웠다고 한다. “아저씨처럼 하시면 가능성 있어요.” 그때부터 남씨는 매월 첫주를 ‘영화사랑 기획주간’으로 만들었다. 그 주에 찾아오는 고객은 남씨가 추천하는 좋은 영화들을 공짜로 볼 수 있다. 첫달엔 돈 받지 않고 그냥 방에 들여보내자니 속이 쓰라렸다. 그러나 세달쯤 지나자 오히려 ‘공짜 손님’이 반가웠단다.

그는 지금 또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내년 초쯤 시골에 내려가 유기농업을 할 생각이다. 이미 장소 선정까지 다 끝낸 상태이다. 그가 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무모한 지원’ 덕택이다. 모두가 우려했지만 아내는 적극적으로 그를 밀어주었다. 그렇다면 신림동의 명물 ‘영화사랑’은 사라지는 걸까? 아니다. “이주의 독자가 된 건 운명 같아요. 제 서른을 행복하게 해줬던 이 비디오방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한겨레21> 독자라면 그의 충실한 ‘대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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