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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카메라로 어둠을 비추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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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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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 말이 없는 사람이다. 전형적인 예술가 스타일이라고 할까. 질문을 하면 짤막한 답변을 할 뿐이고, 모처럼 길게 얘기할 때에도 작고 낮은 목소리라 귀에 힘을 줘야 들린다. 그를 처음 만난 사람은 혹시 ‘왕자병’ 증세가 있지 않을까 의심할 법도 하다. 하지만 확실히 그건 오해다.

젊은 사진작가 양성윤(29)씨. 아직 그를 주목해 주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은 돈 안 되는 장르다. 그러나 그는 ‘온몸으로’ 사진을 사랑하며 지나온 길도, 앞으로 가야 할 길에도 후회는 없을 것이라 말한다. 어릴 적부터 기계를 좋아했던 양씨는 프라모델을 조립하거나 라디오를 분해하는 일 취미였다. 사진을 좋아하게 된 것도 사진기의 기계적 메커니즘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진을 전공한 삼촌에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기초지식을 배우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기 위해 돌아다녔고, 점점 사진의 생생한 ‘현장성’에 매료됐다.

대부분의 고3이 그러하듯, 자신이 가고 싶은 학과를 선택하지 못하고 점수에 맞춰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땐 정말 오렌지족이었어요.” 대학 초기 딱히 사진을 업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고, 뭘 해야 좋을지 모른 채 그야말로 “놀기에만 바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만취상태로 돌아온 집에서 양씨는 방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카메라를 보고 깊은 상념에 빠졌다. 그 밤이 ‘제 2의 사진인생’의 시작이었다.

양씨는 <한겨레21>의 창간독자다. 처음 <한겨레신문> 창간정신에 동의했던 그로서는 <한겨레21>을 구독하면 국민주주가 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계속 구독할 정도로 잡지가 맘에 들었는가라는 질문에 어김없이 짧막한 대답을 한다. “뭐, 그렇지요.” 그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난은 쾌도난담이다. 내용보다는 특유의 장난기어린 어법이 좋다고. 그러나 불만도 많다. ‘패러디 그림마당’은 뭘 나타내는지 잘 모를 때가 종종 있다. 단지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들 때가 있다. 사진작가로서 잡지의 사진수준은 어떻냐고 물어보자, 한참 망설이더니 뻔한 사진은 싫으니 좀더 신선하고 도발적인 사진들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리저리 광고사진을 주문받아 필름값을 마련하여 모조리 다큐멘터리 사진 찍는 데 쏟아붇는 양씨. 그동안 현장을 뛰어다니며 힘든 적도, 보람있었던 때도 많았다. 국제대인지뢰대책협의회의 사진촬영 의뢰를 받아 사고가 나도 본인 책임이라는 각서를 쓰고 비무장지대로 들어갔을 때의 모골 송연한 기억이 아직도 특히 생생하다. 당시 대인지뢰 피해자들을 만나며 전쟁이 끝난 지 50여년이 흐른 지금도 ‘전쟁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그가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은 전시회로 빛을 볼 기회를 한번도 가지지 못한 채 쌓여 있다. 설령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 필름들이 ‘고가의 상품’으로 탈바꿈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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