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757호
촛불은 실패한 줄로만 알았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줄 알았다. 실패한 줄 알았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불씨가 진화했단다. 서울시청 앞에 있던 불씨는 이제 내 주변으로 다가왔다. 새롭게 진화한 호모 칸델리스, 그 끝은 어디일까? 대한민국의 모든 인간이 호모 아담(창조원형인간)으로 진화가 아닌 회귀를 해 인간답게 사는 본연의 모습으로, 더 이상 촛불을 들 일 없는 세상으로 바뀌길 희망해본다. 한장한장 쪽을 넘길수록 가슴이 먹먹해온다. 언론이 탄압당하고 있다. 그런데 그 언론 탄압은 VS의 이종걸·이정희 의원에 이르러 ‘언론이 탄압하고 있다’로 어느새 바뀌었다. 언론이 국민을 탄압하고 국민의 대표를 탄압하고 동족 언론을 탄압하는 세상이다. 아직도 세상 곳곳엔 촛불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은 것 같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했건만 수시로 변하는 입시제도 앞에 가장 힘든 이는 아이들이다. 좋은 제도라고 박차를 가하는 입학사정관제가 사교육만 조장하고 있다니, 또 한 번 부모들의 가벼운 지갑과 아이들의 늘어날 학원 스케줄 걱정에 한숨만 나온다. 근래 서울 지하상가를 돌아다니면서 빨간색으로 도배된 대자보를 보며 한숨만 나왔다. 아무도 이를 언급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겨레21>이 나섰다. 하지만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결국 서울시가 밀어붙이면 제2의 용산 사태가 일어난다는 것인가? 언제까지 국가가 국민을 거리로 내몰지 걱정이 앞선다. 아쉬운 점도 많다. 최근 몇 주간 4·29 재보선에 관한 기사에서 군소 후보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은 어쩔 수 없이 이야깃거리인 거물(?)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언론의 관심이 국민의 관심인 것은 아니다. 언론에 노출된 사람만 인지도를 높일 뿐이다. 역시 레드다. 지지리 궁상은 혁명이다! 좋았다. 그런데 가난하게 살자고 역설하더니 다음 페이지에 고가의 청바지를 배치하다니! 비교체험 극과 극인가? 조선시대에 신용불량죄로 곤장 맞는 것 같은 기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아햏햏한 기분이다. 남궁성열 18기 독자편집위원
사진 REUTERS/ PHIL NOB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