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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의 오래된 물건] 아버지 앞에서 사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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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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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석 경북 칠곡군 북삼읍

2월이면 학교마다 졸업식이 한창이다. 1980년 2월, 부모님께서 참석하신 가운데 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아버지께서는 당시에는 제법 비쌌던 한 출판사의 영한사전을 졸업선물로 사주셨다. 지금이야 MP3 플레이어나 휴대전화를 많이 선물하지만 그때는 사전이나 문구류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정들었던 학교와 선생님, 친구들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사전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에서도 영어 수업을 하지만 당시에는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운지라 알파벳 순서만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는데 방 안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시던 아버지께서 느닷없이 책꽂이에 꽂혀 있던 우표 수집책에 씌인 ‘STOCK’이란 단어를 찾아보라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도 아버지께서는 성격이 불같으셔서 많이 어려워하고 있던 나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에선 이후 벌어질 일이 걱정됐다.

아니나 다를까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신 아버지의 불호령이 마침내 떨어지고 부들거리는 손으로 겨우 그 단어를 찾았는데 뜻이 한 가지가 아닌지라 어느 것을 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 이후는 독자분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얼마 전 나도 아들에게 영한사전을 사주었다. 28년 전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아들에게 느닷없이 영어단어를 찾아보라고 했다. 평소에 제법 영어를 잘하던 아들도 그때의 나처럼 허둥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5년 전 간암으로 세상을 뜨신 아버지를 회상했다.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그 소중한 영어사전으로 영어공부를 했고, 지금은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손때가 묻고 낡아서 이제는 사용하지 못하고 책장 한켠만 차지하고 있지만 늘 아버님을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나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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