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독자/ 대학생 김경목씨
김경목. 이 이름 석자가 <한겨레21>에 나오는 것이 그의 평생에 걸친 소원 두 가지 중 한 가지였던 독자. 그가 이제야 첫 번째 소원을 풀었다. 두 번째 소원은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하는 것. 다른 신문사는 절대로 안 되고 오직 한겨레신문사에만 입사하고 싶단다. 그는 두 번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밤잠을 설치며 공부하고 있다.
그가 <한겨레21>을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 학생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 보는 순간에 편집이 세련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다른 잡지와 비교해 가장 진보적이라서 정기구독을 시작했다. 노동과 인권 문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가장 맘에 든다고 한다. 군대를 다녀온 뒤 다시 구독신청을 한 그는 잡지에 별 불만이 없지만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광범위하게 다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털어놓는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이 있다면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스포츠, 음식이야기, 넷세상 등 여러 고정란이 있는데, 너무 형식적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김씨는 최근 읽은 노동운동의 위기를 다룬 344호 특집기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노동운동의 위기가 그가 겪어온 학생운동의 위기와 ‘오버랩’되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95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학생회 활동을 시작했다. 97년 한양대에서 개최된 한총련 출범식 때 연행되어 구치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전까진 전혀 사회를 모르는 철부지였어요. 구치소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철이 들었죠.” 그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다 싸움 끝에 살인을 저지른 어느 사형수이다. 처음 겪어보는 감옥생활이라 겁도 많이 났고, 특히 ‘사형수’라고 생각하니, 그를 보면 주눅부터 들었다. 그러나 그는 사형수임에도 너무나 낙천적이었고, 자신에게도 잘 대해줬다. 김씨는 그를 보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다섯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가 학생회 활동을 하며 집에 잘 들어오지 않자, 어머니가 밤잠을 못이루며 걱정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지금까지도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점은 어떤 질책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믿어줬다는 것이다. “지금은 별 걱정하지 않으시죠. 제가 일찍 들어오고 공부도 열심히 하니깐요.”
학생운동을 하며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는 점이 가장 큰 보람이지만, 그 때문에 학업을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다. 군대를 제대한 뒤 펑크난 학점을 때우느라 연일 도서관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그러나 학생운동에 대한 관심을 아예 거둔 것은 아니다. 그는 요즘 학생운동에 희망이 보인다고 말한다. “위기에 대해 학생회에서도 다들 반성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려 해요. 분명히 희망은 있죠.”
독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을 때 그의 꿈은 통역사였다. 왠지 멋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꿈을 버렸고, 오직 하나의 꿈만을 꾸고 있다. 그를 머지않아 동료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독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을 때 그의 꿈은 통역사였다. 왠지 멋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꿈을 버렸고, 오직 하나의 꿈만을 꾸고 있다. 그를 머지않아 동료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