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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의오래된물건 ] 워크맨에 시험 점수를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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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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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몸마저 나른해지는 오후, 오늘 나는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테이프로 음악을 듣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됐지만, 아직도 어학 공부를 할 때면 테이프가 편하기 때문에 어김없이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워크맨을 다시 꺼내게 된다.

여기저기 물건을 흘리고 다니는 게 주특기인 내가 여태까지 해먹은 제품들을 나열해보자면, MP3플레이어 하나에 전자사전 하나를 도둑맞고, 휴대전화 두세 개는 벌써 갈아치웠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너무한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런데 잃어버리지도 않고 잘 쓰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워크맨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소풍을 갈 때면 한두 명이 워크맨에 가요 테이프를 넣어 들고 오곤 했다. 버스 뒷자리에서 부럽지 않은 척 게임에 열중하다가도, 슬쩍 아이들이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워크맨을 가진 친구 옆자리에 앉아서 음악을 엿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유롭게 가사집을 펼쳐보며, 기획사들이 경쟁적으로 내놓은 그룹들을 비교했다(S.E.S와 핑클, O-24(오투포)의 안무 동작은 꽤나 심오했다). 해박한 연예계 지식과 가십들을 풀어내는 재미란. 그 뒤 가전제품 도매업을 하시던 아버지께 워크맨 하나 있으면 시험 잘 볼 것 같다고 졸라대서, 그 유명한 일제 워크맨을 갖게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되는 상황이지만, 당시 시험 점수를 걸고 워크맨을 갖기 위해서 얼마나 악착같이 공부했는지. 그때 MP3플레이어가 처음 나왔는데, 아버지는 MP3플레이어의 보급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아직까지는 워크맨이 강세라고 하셨다. 뒤에 내가 MP3플레이어를 갖게 되고, CD를 모으는 사치를 누리게 되자, 워크맨은 자연히 동생이 쓰게 되었다. 나름대로 워크맨도 튜닝 시대라 스티커도 하나 붙고 밋밋했던 리모컨에 무늬 있는 비닐을 씌워놓은 상태였다.

MP3플레이어나 CD플레이어가 고장났을 때, 간간이 대타가 되어준 워크맨인데, 생각해보니 그 오랜 시간 고장 한 번 안 나고,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 책상 서랍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마치 내가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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