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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동양철학을 선택한 법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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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1-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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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독자/ 공익근무요원 김학남씨

강증산 상제가 어떻고, 후천 개벽이 어떻고, 최근 기상이변이 어떻고….

그 많은 이주의 독자와의 만남 중 이렇게 엄숙한 분위기는 없었다. 동양철학과 증산도에 푹 빠져 있는 경기도 광주 하남소방서 공익근무요원 김학남(24)씨. 그와의 만남은 긴 설교로 시작되었다.

현재 그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하남소방서 오포파출소는 직원이 모두 13명밖에 되지 않은 작은 파출소이다. “군대간 친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생활은 정말 편해요.” 직원이 적어서 아기자기한 가족적인 분위기이고, ‘불끌 일’도 그리 많지 않다. 가끔 부상당한 새를 구해달라고 연락오기도 하고, 벌집 좀 떼달라는 신고도 들어오지만 그래도 본서보다는 근무여건이 훨씬 낫다. 그러나 형식적인 행정처리가 너무 많아, 자기 할 일을 못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직원들을 볼 때는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그가 <한겨레21>을 만난 건 법대 1학년 시절이다. 선배가 우연히 던져준 잡지 1권이 김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처음 받아보고 이런 잡지도 있었구나 싶었는데, 나중에 다른 주간지와 비교해보니 훨씬 좋은 잡지더군요.” 다른 주간지들은 정치와 경제 중심인 데 반해, <한겨레21>은 훨씬 다채롭고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좋았고 베트남 양민학살과 관련된 기사들도 인상에 깊이 남았다. 우리에게도 노근리 등 아픈 역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도 잘못된 역사가 있는 것은 분명하고,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을 꿋꿋하게 추진하는 모습이 멋있게 비쳤다고 한다. 무슨 난이 가장 마음에 드냐고 묻자, 역시 대답은 ‘이상수의 동서횡단’이었다. “지금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맞고 있는데, 이를 수용할 만한 뚜렷한 철학이 없어요. <한겨레21>이 좀더 새로운 정신적 지표를 찾아줬으면 해요.” 동양철학의 ‘마니아’다운 대답이다.

그의 부모님은 경기도 광주에서 평생 농사를 지어오신 분들이다. 그가 한양대 법대에 입학했을 때 식구들 모두 큰 기대를 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법학에 애정을 갖지 못했다. 원래 그는 바른 공무원이 되어 잘못된 제도를 뜯어고치기 위해 행정학과에 가고 싶어했다. 점수에 맞춰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법학과는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누군가 그랬죠. 헌법을 보면 아름다운 말들만 가득하지만, 정작 현실은 그렇지 않다구요.” 그의 방황을 치유한 것이 바로 증산도의 철학이었다. 기자가 ‘도를 아십니까?’ 하고 길거리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증산도와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아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설법’을 듣고 있어야 했다.


그는 공익근무요원을 마치면 돈을 모아 동남아 배낭여행을 갈 예정이다. “고시를 볼 생각은 없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시겠지만 졸업하고도 계속 동양철학과 증산도에 관계된 일을 할 생각이란다. 그의 믿음이 옳은지, 틀린지, 혹은 그가 선택한 길이 과연 바른 길인지 현재로선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앞으로 동양정신의 깊은 곳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만큼 크고 소중한 것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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