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래된 물건] 어머님의 수첩을 늘어놓고
등록 : 2005-08-25 00:00 수정 :
검은색 장부책 1권과 두개의 손가방은 90년 3월에 결혼하면서 내 물건이 된 것들이다. 원래는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짐을 정리하다가 발견된 뒤 자연스럽게 내게 왔다. 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시들해지고 우울해질 때마다 이 물건들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들여다본다.
어머님은 30대 중반에 홀로 되셨다. 색이 바랜 장부책은 어머님 홀로 4남매를 키우신 기록들이다. 아버님 생신, 기일, 4남매의 생일과 태어난 시각, 자식들의 통지표와 큰아들의 입영통지서, 은행 통장번호, 친척들의 연락처, 자식을 키우면서 힘들었던 일들이 기억돼 있다. 손가방에는 작은 수첩들이 있는데 어머님이 쓰셨던 그대로 제목을 말하자면 화분갈이, 나의 건강, 요리 수첩, 그리고 돈 계장부(당시 계를 하셨던 모양이다). 그 외에 나무 인장 4개와 병원 진료카드 서너장이 있다. 화분갈이 수첩에는 ‘작은 규율나무, 성류, 긴 선인장, 외국 무궁화, 아기 선인장, 빨간 선인장, 목련, 적색 장미’를 심은 날짜, 분갈이한 날짜 등이 적혀 있다. 요리 수첩에는 새우튀김, 더덕구이, 쌈장을 만드는 법이 적혀 있다. 돈 계장부의 명단엔 간판집, 과일집 뺄손이, 어름집, 노점상 들이 올려져 있다. ‘나의 건강’ 수첩은 내 맘을 늘 아프게 한다. 고혈압 약의 종류와 민간 처방법, 관련 병원명들과 몸 상태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으셨다. “발바닥이 화끈거린다. 소화가 잘 안 된다. 겨울에 머리에 스카프를 쓰지 않으면 머리가 시리다. 등이 뽀개지는 것 같다 1979. 3.8.” 결국 83년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고 88년 즈음 57살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선 ‘자식 덕 좀 보려니 죽는다’는 말들이 오갔다. 어머님은 20여년을 혼자 몸으로 다른 이 가슴에 못 박는 일만 빼고 안 해보신 일이 없이 4남매 공부를 다 시키고 가셨다. 자식들이 눈에 밟혀 어찌 눈을 감으셨을까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8월20일이 어머님의 기일이다. 지금은 파주 공원묘지 제일 높은 곳에 계신다.
김향숙/ 서울시 동작구 신대방1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