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청문회
노동운동의 산 증인 하종강씨에게 ‘진짜 노동자’ 뒷이야기를 듣는다
얼마 전까지 역사이야기를 연재한 한홍구 교수는 하종강씨를 ‘천재’라 칭찬하고, 하종강씨는 한술 더 떠 한 교수를 ‘우리 시대의 몇 안 남은 천재 가운데 하나’라 치켜세운다. 이 사이좋은 ‘천재’들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말발’이다. 1년에 300회 이상 강연을 다니는 하종강씨를 어렵게 졸라서 연 청문회에서 독자편집위원들, 아니 현재와 미래의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상황의 문제점과 대안에 대한 장시간의 ‘강의’를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은 노동자들에게 물 한잔 떠다주는 일”이라는 그의 진단은 깊고도 놀라웠다. 정리를 담당한 기자의 어깨가 뻐근했음은 물론이다.
파업가 들으며 눈물 흘리던 때
소리나: 어떤 계기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하종강(아래 하): 대학 때 학생운동을 했는데 그땐 90%가 노동운동을 했을 겁니다. 지금처럼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지 않았어요. 대학을 졸업하면 대기업에 들어가 자본의 하수인이 되든지 현장에서 노동자가 되든지밖에 다른 선택이 없는 시기였습니다. 최일우: 노동교육전문가로 일하신 건 언제부터인가요. 하: 교육을 주로 담당한 건 4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노동자들과 처음 뭘 하기 시작한 건 1980년부터인데 교육보다는 자료제작 등을 했어요. 연구소라는 명칭을 가진 다음부터는 자료 뒤적이며 격월간으로 연구서를 냈죠. 처음엔 상담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다 지금은 교육이 중심이에요. 내가 그렇게 해야지 하고 생각한 게 아니라 다른 분들이 그렇게 요구를 하셨어요. 제가 하는 일은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겁니다. 노동자들에게 물 한잔이라도 떠다주는 일이죠. 한효민: 노동상담을 위해선 법을 많이 아셔야 하는데 법공부를 따로 하신 겁니까. 하: 예, 했어요. 노동법 공부를 혼자 하거나 팀 짜서 하기도 하고 합숙공부도 한 적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노동법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대학은 한 대학뿐이에요. 노동법을 전공한 교수가 없는 대학이 굉장히 많고 사법고시에서도 노동법을 보지 않습니다. 1차에서 노동법을 선택하면 볼 수 있지만, 공부 많이 해야 하는 노동법을 선택하는 사람이 별로 없죠. 사법연수원에서는 노동법을 선택과목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법조인으로 출세하거나 돈을 많이 벌겠다는 사람은 노동법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노동법 전문가를 거의 어느 곳에서도 배출하지 않는 공포영화와 같은 상황이에요. 한효민: 상담까지 포함해 2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소개해주세요. 하: 온건개혁성향의 노조에 교육을 하러 갔는데 집행부가 내세우는 안건을 노조간부들이 사사건건 반대했어요.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였죠.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 전국규모 노동운동이 가지는 문제인데, ‘이번 집회가 경상도지만, 난 전라도야’라고 생각하는 지역감정 때문이었어요. 밖에서 강의 준비를 하다가 견딜 수가 없어 내 차례도 아닌데 마이크를 잡았어요. 그 당시는 대기업 연대조직이 다 깨졌을 때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러는 걸 사장이 창 너머 보지 않는다고 모르겠느냐. 우리끼리면 머리가 깨져도 괜찮지만, 회사쪽이 다 보고 있다고 얘기하고 그냥 나와버렸어요. 그때 노동자들이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그 노래가 복도에 울려퍼지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대개 어려움이 있지만 뭔가 희망을 발견할 때가 기억에 남아요. 박경남: 87년에 3천개 노조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투쟁한 노동자들이 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건 아닙니다. 후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전 그런 사람들에게 더 공감합니다. 그런 분들에 관심 가져주실 순 없는지요. 하: 망설이면서 끼어들었다가 그때 경험들을 평생 동안 짐으로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역사의 주인이긴 한데…. 생각했지만 만나기 어려웠어요. 애초 칼럼을 제안받았을 때 내가 사람을 일부러 만나러 다닐 시간은 없고, 활동 중에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겠다고 얘기했어요. 요즘 너무 활동가 중심이라는 지적을 많이 받아요. 지금도 과거 활동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후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찾으면 시간을 내서 만나보겠습니다. 현 정부도 노사협조의 틀 못 벗어나 최일우: 최근 계약직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우리 노동자 사이에도 계급이 있지 않나 싶어요. 하: 지적하신 문제가 노동운동 진영의 가장 큰 문제고, 노동자가 스스로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노동운동에 희망이 없을 겁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면 우리 사회가 20 대 80의 사회가 아니라 비정규직과 극빈층 20, 잘사는 정규노동자 80의 사회라고 얘기해요. 한 대학부속병원에서 빨래하는 아줌마들은 5~6년 일하셨는데 50만원밖에 못 받아요. 60만원 달라고 요구하다 모두 해고됐어요. 정규직노조가 도와주면 좋을 텐데 안 도와줄 뿐 아니라 방해까지 합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우리 노동운동의 가장 큰 문제라고 인식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도 비정규직 노동자 사업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최일우: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하: 현 정부도 노사협조의 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이 노사정위원회를 강화하겠다고 밝혔잖아요. 노사정위에서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나온 내용들은 즉각적으로 실행되고 유리한 내용은 거의 실행되지 않았어요. 노사정위가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약화시키는 완충제 역할을 충실히 했죠. 노사정위의 틀을 현 정부도 벗어나기 어렵고, 특히 내년 총선까지 상당히 많은 개혁정책들이 후퇴될 겁니다. 공무원노조 합법화나 주5일 근무제 정도는 추진할 겁니다. 내년 총선에 보수세력이 힘을 더 잃으면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겠죠. 이윤영: 노동칼럼말고 다른 걸 써보고 싶지는 않으신지. 하: 전에 고속도로 휴게소 평전을 <말>에 연재한 적 있어요. 고속도로 휴게소 밥을 일주일에 3일은 먹었는데 단무지가 정말 맛없는 집이 있어요. 다음에 또 오지 않도록 수첩에 휴게소 음식평을 적었어요. <말> 기자가 그걸 보고 연재하자고 해서 시작했는데, 발전노조 사태가 터졌어요. 명동성당에서 투쟁하는 사람들 보면서 음식평이나 쓸 수는 없다니까 기자가 그만 쓰라더군요. 한효민: 일주일에 서너번 지방에 가신다면 가족에 소홀하셨을 텐데요. 하: 지금은 많이 적응했지만 예전에는 부부 간 불화도 있었어요. 언젠가 집에 대자보가 붙은 적도 있어요. ‘아이들은 아빠와 놀고 싶다’, ‘일주일에 두번 열시 전에 들어와라’, ‘가족의 최저생계 보장하라’. 이런 요구사항을 붙여놓고 자더군요. 다음날 아침에 뭐라고 반박할까 생각하다 ‘일찍 들어오세요라는 말로 남편을 무능하게 만들지 말라’고 써붙여놓고 나갔죠.(웃음) 저는 남들 일과시간이 끝나야 바빠집니다. 일찍 들어오라는 건 무리한 요구죠. 그렇다고 이 일만 하면 가정이 파괴되니까 저는 상당히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겁니다. 소리나: 지금은 아들이 아버지 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하: 아이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가 노동조합 교육하고, <한겨레21> 글을 쓰냐고 물으셔서 아들이 그렇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라고 했답니다. 그 뒤로 정말 아이가 달라졌어요. 전 아내 때문에 사람 구실하게 된 대표적 남편이에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20년 동안 설계해온 인생을 완벽하게 포기하지 않으면 유인물 한장 못 쓴 시대예요. 집사람이 만일 앞으로 평생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이 될까 하는 고민이라면 안 해도 된다고, 다른 건 모르지만 결혼하면 자기가 벌 수 있다고 편지를 보냈어요. 집사람은 내가 평생 쓸 활동비를 보태줄 생각을 했는데 2년 만에 손 안 벌리게 됐고, 요즘은 남겨서 갖고 와요.(웃음) 80살까지 이 일만 했으면… 승인: 이주 노동자를 위한 노동법은 있습니까. 하: 이주 노동자들에게 별도로 적용되는 법은 없고, 우리나라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은 불법체류든 합법체류든 근로기준법을 적용받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 걸 잘 안 해주니까 싸움을 해서 하나씩 고쳐나갑니다. 이주 노동자들이 처음 들어올 때 그들을 위한 단체에 가입했다 그 활동을 하지 못해서 부채감을 안고 있어요. 땡볕에 책상 하나 놓고 필리핀 노동자들을 상담할 때도 있었는데 그 활동을 지속적으로 못했어요. 승인: 전 영세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불편한 점을 얘기할 수 있는 통로가 없고, 이주 노동자들도 말이 안 통해서 불만사항을 고용주에게 얘기할 수 없어요. 그런 분들에게 조언하신다면. 하: 결국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싸울까 아니면 현재 상태를 유지할까 결정해야죠. 손해를 보지 않고 해결하는 건 거의 없어요. 인생이 완전히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면 약간의 불이익을 감내하는 것이 낫겠죠. 하지만 저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얘기를 직접 못합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봅시다’ 하고 몇 개월 뒤 회사 화장실에 낙서 하나 쓰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이런 숨어 있는 노력이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찬란한 꽃으로 핀 겁니다. 지금도 신자유주의 물결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숨죽여 계속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중에는 활짝 꽃 필 겁니다 한효민: 앞으로의 계획은. 하: 이대로 80년은 살면 좋겠어요. 이 일만 계속했으면 해요. 최일우: 1년에 300번 이상 강연하니 돈 많이 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강연료를 솔직히 얘기해주실 순 없나요. 하: 별도의 기준이 없어요. 노조 상태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히려 도와줄 때도 있고 많이 받을 때도 있죠. 평균을 따지면 10만원도 채 안 됩니다. 가끔 초청자가 물어볼 땐 형편에 따라 받으니 부담 갖지 말라고 해요.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사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 노동운동에 희망은 없습니다.” 하종강(뒷줄 왼쪽에서 세번째)씨의 청문회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분위기였다. (류우종 기자)
소리나: 어떤 계기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하종강(아래 하): 대학 때 학생운동을 했는데 그땐 90%가 노동운동을 했을 겁니다. 지금처럼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지 않았어요. 대학을 졸업하면 대기업에 들어가 자본의 하수인이 되든지 현장에서 노동자가 되든지밖에 다른 선택이 없는 시기였습니다. 최일우: 노동교육전문가로 일하신 건 언제부터인가요. 하: 교육을 주로 담당한 건 4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노동자들과 처음 뭘 하기 시작한 건 1980년부터인데 교육보다는 자료제작 등을 했어요. 연구소라는 명칭을 가진 다음부터는 자료 뒤적이며 격월간으로 연구서를 냈죠. 처음엔 상담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다 지금은 교육이 중심이에요. 내가 그렇게 해야지 하고 생각한 게 아니라 다른 분들이 그렇게 요구를 하셨어요. 제가 하는 일은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겁니다. 노동자들에게 물 한잔이라도 떠다주는 일이죠. 한효민: 노동상담을 위해선 법을 많이 아셔야 하는데 법공부를 따로 하신 겁니까. 하: 예, 했어요. 노동법 공부를 혼자 하거나 팀 짜서 하기도 하고 합숙공부도 한 적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노동법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대학은 한 대학뿐이에요. 노동법을 전공한 교수가 없는 대학이 굉장히 많고 사법고시에서도 노동법을 보지 않습니다. 1차에서 노동법을 선택하면 볼 수 있지만, 공부 많이 해야 하는 노동법을 선택하는 사람이 별로 없죠. 사법연수원에서는 노동법을 선택과목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법조인으로 출세하거나 돈을 많이 벌겠다는 사람은 노동법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노동법 전문가를 거의 어느 곳에서도 배출하지 않는 공포영화와 같은 상황이에요. 한효민: 상담까지 포함해 2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소개해주세요. 하: 온건개혁성향의 노조에 교육을 하러 갔는데 집행부가 내세우는 안건을 노조간부들이 사사건건 반대했어요.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였죠.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 전국규모 노동운동이 가지는 문제인데, ‘이번 집회가 경상도지만, 난 전라도야’라고 생각하는 지역감정 때문이었어요. 밖에서 강의 준비를 하다가 견딜 수가 없어 내 차례도 아닌데 마이크를 잡았어요. 그 당시는 대기업 연대조직이 다 깨졌을 때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러는 걸 사장이 창 너머 보지 않는다고 모르겠느냐. 우리끼리면 머리가 깨져도 괜찮지만, 회사쪽이 다 보고 있다고 얘기하고 그냥 나와버렸어요. 그때 노동자들이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그 노래가 복도에 울려퍼지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대개 어려움이 있지만 뭔가 희망을 발견할 때가 기억에 남아요. 박경남: 87년에 3천개 노조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투쟁한 노동자들이 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건 아닙니다. 후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전 그런 사람들에게 더 공감합니다. 그런 분들에 관심 가져주실 순 없는지요. 하: 망설이면서 끼어들었다가 그때 경험들을 평생 동안 짐으로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역사의 주인이긴 한데…. 생각했지만 만나기 어려웠어요. 애초 칼럼을 제안받았을 때 내가 사람을 일부러 만나러 다닐 시간은 없고, 활동 중에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겠다고 얘기했어요. 요즘 너무 활동가 중심이라는 지적을 많이 받아요. 지금도 과거 활동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후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찾으면 시간을 내서 만나보겠습니다. 현 정부도 노사협조의 틀 못 벗어나 최일우: 최근 계약직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우리 노동자 사이에도 계급이 있지 않나 싶어요. 하: 지적하신 문제가 노동운동 진영의 가장 큰 문제고, 노동자가 스스로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노동운동에 희망이 없을 겁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면 우리 사회가 20 대 80의 사회가 아니라 비정규직과 극빈층 20, 잘사는 정규노동자 80의 사회라고 얘기해요. 한 대학부속병원에서 빨래하는 아줌마들은 5~6년 일하셨는데 50만원밖에 못 받아요. 60만원 달라고 요구하다 모두 해고됐어요. 정규직노조가 도와주면 좋을 텐데 안 도와줄 뿐 아니라 방해까지 합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우리 노동운동의 가장 큰 문제라고 인식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도 비정규직 노동자 사업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최일우: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하: 현 정부도 노사협조의 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이 노사정위원회를 강화하겠다고 밝혔잖아요. 노사정위에서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나온 내용들은 즉각적으로 실행되고 유리한 내용은 거의 실행되지 않았어요. 노사정위가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약화시키는 완충제 역할을 충실히 했죠. 노사정위의 틀을 현 정부도 벗어나기 어렵고, 특히 내년 총선까지 상당히 많은 개혁정책들이 후퇴될 겁니다. 공무원노조 합법화나 주5일 근무제 정도는 추진할 겁니다. 내년 총선에 보수세력이 힘을 더 잃으면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겠죠. 이윤영: 노동칼럼말고 다른 걸 써보고 싶지는 않으신지. 하: 전에 고속도로 휴게소 평전을 <말>에 연재한 적 있어요. 고속도로 휴게소 밥을 일주일에 3일은 먹었는데 단무지가 정말 맛없는 집이 있어요. 다음에 또 오지 않도록 수첩에 휴게소 음식평을 적었어요. <말> 기자가 그걸 보고 연재하자고 해서 시작했는데, 발전노조 사태가 터졌어요. 명동성당에서 투쟁하는 사람들 보면서 음식평이나 쓸 수는 없다니까 기자가 그만 쓰라더군요. 한효민: 일주일에 서너번 지방에 가신다면 가족에 소홀하셨을 텐데요. 하: 지금은 많이 적응했지만 예전에는 부부 간 불화도 있었어요. 언젠가 집에 대자보가 붙은 적도 있어요. ‘아이들은 아빠와 놀고 싶다’, ‘일주일에 두번 열시 전에 들어와라’, ‘가족의 최저생계 보장하라’. 이런 요구사항을 붙여놓고 자더군요. 다음날 아침에 뭐라고 반박할까 생각하다 ‘일찍 들어오세요라는 말로 남편을 무능하게 만들지 말라’고 써붙여놓고 나갔죠.(웃음) 저는 남들 일과시간이 끝나야 바빠집니다. 일찍 들어오라는 건 무리한 요구죠. 그렇다고 이 일만 하면 가정이 파괴되니까 저는 상당히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겁니다. 소리나: 지금은 아들이 아버지 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하: 아이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가 노동조합 교육하고, <한겨레21> 글을 쓰냐고 물으셔서 아들이 그렇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라고 했답니다. 그 뒤로 정말 아이가 달라졌어요. 전 아내 때문에 사람 구실하게 된 대표적 남편이에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20년 동안 설계해온 인생을 완벽하게 포기하지 않으면 유인물 한장 못 쓴 시대예요. 집사람이 만일 앞으로 평생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이 될까 하는 고민이라면 안 해도 된다고, 다른 건 모르지만 결혼하면 자기가 벌 수 있다고 편지를 보냈어요. 집사람은 내가 평생 쓸 활동비를 보태줄 생각을 했는데 2년 만에 손 안 벌리게 됐고, 요즘은 남겨서 갖고 와요.(웃음) 80살까지 이 일만 했으면… 승인: 이주 노동자를 위한 노동법은 있습니까. 하: 이주 노동자들에게 별도로 적용되는 법은 없고, 우리나라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은 불법체류든 합법체류든 근로기준법을 적용받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 걸 잘 안 해주니까 싸움을 해서 하나씩 고쳐나갑니다. 이주 노동자들이 처음 들어올 때 그들을 위한 단체에 가입했다 그 활동을 하지 못해서 부채감을 안고 있어요. 땡볕에 책상 하나 놓고 필리핀 노동자들을 상담할 때도 있었는데 그 활동을 지속적으로 못했어요. 승인: 전 영세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불편한 점을 얘기할 수 있는 통로가 없고, 이주 노동자들도 말이 안 통해서 불만사항을 고용주에게 얘기할 수 없어요. 그런 분들에게 조언하신다면. 하: 결국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싸울까 아니면 현재 상태를 유지할까 결정해야죠. 손해를 보지 않고 해결하는 건 거의 없어요. 인생이 완전히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면 약간의 불이익을 감내하는 것이 낫겠죠. 하지만 저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얘기를 직접 못합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봅시다’ 하고 몇 개월 뒤 회사 화장실에 낙서 하나 쓰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이런 숨어 있는 노력이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찬란한 꽃으로 핀 겁니다. 지금도 신자유주의 물결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숨죽여 계속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중에는 활짝 꽃 필 겁니다 한효민: 앞으로의 계획은. 하: 이대로 80년은 살면 좋겠어요. 이 일만 계속했으면 해요. 최일우: 1년에 300번 이상 강연하니 돈 많이 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강연료를 솔직히 얘기해주실 순 없나요. 하: 별도의 기준이 없어요. 노조 상태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히려 도와줄 때도 있고 많이 받을 때도 있죠. 평균을 따지면 10만원도 채 안 됩니다. 가끔 초청자가 물어볼 땐 형편에 따라 받으니 부담 갖지 말라고 해요.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