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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네 색깔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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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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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을 그냥 두기 싫은 독자편집위원회 출범… 기자들에게 긴장을 선물로 주겠다

제1기 독자편집위원회 명단

채규정(53) 교사 kyjoungu@edunet4u.net
장성하(40) 북디자이너ss5847@chollian.net
김복숙(39) 주부 boksooki@hanmail.net
홍윤기(37) 교수 uirohong@netsgo.com
이은주(32) 지하철공사 노동자 kimsane@nownuri.net
이혜연(29) 연구원 frufrok@hanmail.net
양성윤(29) 사진작가 ugeme1999@yahoo.co.kr
강화수(28) 시민단체 간사 hwasoo@mail.ccej.or.kr
문진화(28) 양호교사 394-6505@hanmail.net
김호귀(25) 교사 shyarara@chollian.net
이선숙(22) 대학생 sunsook_lee@hanmail.net

“신문사 건물이 왜 이렇게 구석진 곳에 있죠?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바로 보일 줄 알았는데.”

독자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오만한’ 독자들이 <한겨레21>을 찾아왔다. 사오마이 태풍이 남기고 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9월16일 저녁, 한자리에 모인 독자들은 궂은 날씨에 지하철역에서 신문사 건물까지 걸어오는 불편을 감수하고도 들뜨고 즐거운 표정이었다. 물론 이들은 열혈독자들이다. 독자면을 주의깊게 읽는 이라면 이들의 면면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겨레21 마니아’를 자처하며 잡지에 대한 치밀한 분석으로 기자들을 긴장시켰던 홍윤기씨, 철도노동자인 남편과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절절히 털어놓은 이은주씨, 멜로배우적(?)인 용모 덕택인지 유난히 연락처를 묻는 독자들이 많았던 양성윤씨, 양호교사의 애환을 통해 교육문제를 짚어준 문진화씨, 잡지를 학습지처럼 줄 그어가며 읽는 이선숙씨…. 이쯤되면 짐작이 갈까. 이들 중 대다수는 ‘이주의 독자’란에 한번씩 초대된 경험이 있다. 하긴 열혈독자의 ‘대표주자’들만 찾아 연락을 했으니, 이주의 독자로 선정된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매주 ‘끈질기게’ 독자엽서를 보내며 독자면 담당자를 괴롭혀온 이들도 많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한 가지. 바로 ‘제1기 독자편집위원회’의 첫 회의를 위해서다. 독자편집위원회는 그동안 독자들의 의견을 지면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토대로 <한겨레21>이 지면개편을 계기로 제작진과 독자들의 접촉을 활성화하기 위해 마련한 통로다. 지역, 연령, 직업 등을 고려해 전국에서 11명의 편집위원을 선정했다. 이번 회의에는 개인사정으로 부득이 참석하지 못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7명의 독자가 참석했다. 참석하지 못한 독자 중 채규정씨와 김호귀씨는 각각 군산과 부산에 거주하는 지방 독자다. 채규정씨는 창간호부터 잡지를 한권도 빼놓지 않고 모아오고 있는 고교교사이며, 김호귀씨는 날카로운 지적을 담은 독자엽서로 독자면에 단골로 등장하는 새내기 중학교 교사. 이들은 앞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메일을 통해서라도 편집진과 만날 예정이다. 장성하씨는 이주의 독자에 소개된 바 있는 ‘가난한’ 북디자이너이고, 김복숙씨는 가족과 함께 창간호부터 구독하고 있는 주부다.


독자편집위원들은 앞으로 매월 한번씩 머리를 맞대고 지난 기사들에 대한 평가와 함께, 독자의 입장에서 권고와 제안을 해나갈 것이다. 평가 작업을 통해 한달간 가장 잘된 기사, 잘못된 기사도 선정하게 된다(기자들이여 긴장하라!).

김종구 편집장의 사회로 진행된 첫 번째 회의에서는 잡지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지면개편을 통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발행부수와 같은 ‘영업비밀’을 묻는 질문부터 시작해 이들은 <한겨레21>에 대해 남의 일 같지 않게 걱정을 털어놓았다. 결론은 한마디로 “네 색깔을 지켜라”이다. 변화된 세상에 발맞춰 가는 것은 좋지만, <한겨레21>의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생존의 법칙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한겨레>가 계속 견지해야 할 진리는 무엇이고,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것은 독자편집위원회가 편집진들과 함께 짊어지고 나가야 할 짐이기도 하다.

문진화: 항상 <한겨레21>을 생각하면 딜레마에 빠져요. 처음에 시작할 때 소외된 민중을 위한 것이었는데,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새로운 문화에 대해서만 포커스를 맞추려고 해요. 저는 시대에 따라서 진리가 변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고 믿어요. 그 진리를 중심에 둬야 하는데, 시대가 자꾸 디지털화되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야 하나 하는 딜레마에 많이 빠지는 것 같아요. 저는 <한겨레21>만의 색깔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잡지가 꿋꿋이 살아남는 것은 그 색깔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들을 좀더 중심을 가지고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죠. 소외된 사람들을 다룬 기사들은 굉장히 오래 기억에 남거든요. 그런 식으로….

이은주: 주변에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시사주간지들도 점점 진보적이 되는 것 같고 하니까 차별성을 못 느낀다는 불평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제 정체성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봐야 해요. 세상이 다양성을 주장한다고 하지만 좀더 분명하게 자기 주장을 가지고, <한겨레>가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것을 분명히 해야죠. <조선일보>가 그렇게 극우적으로 가고 있는 것과 한축을 이루어서 점점 더 명확하게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펼친다면, 노동자들에게도 구독해달라고 떳떳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사진/지난 9월 16일 한겨레심문사 건물 앞에서 김종구 편집장(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과 기념촬영을 한 독자편집위원들)

홍윤기: 2년제 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아요. 4년제 정규대학에 다닐 형편이 안 되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기사가 실렸으면 좋겠어요. 굳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자기 자리에서 땀흘려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다루면, 명문대 선호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우리 학생들에게도 희망이 되지 않을까요.

또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요. 현재 전체적인 내용을 똑같은 분량으로 종합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해서 한 묶음이지만 간단하게 분리할 수 있는 기능도 도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한 책 안에서 몇개의 섹션으로 나눠 볼 수도 있겠죠. 가령 한달을 네번으로 나누어서 첫주는 사회, 문화에 관한 각종 지표라든가 통계들을 제공해줄 수도 있고, 다음주는 요즘 Y세대의 새로운 문화에 대해서 분석을 해주고, 또 한주는 스포츠나 레저, 마지막 주는 과학, 기술이 될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네주를 다른 섹션으로 나눈다면 고급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잡지를 모두 쌓아놓지 않고 그 부분만 따로 떼어 볼 수 있어 유용하고, 종합지이면서도 전문지의 성격을 갖추게 되겠죠.

강화수: 전문지와 종합 시사잡지를 구분하는 건 좀 상투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특정분야만을 다룬다고 해서 전문지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한겨레21>도 생활 속에서의 진보를 다루는 진보적 전문지가 될 수 있는 거라고 봐요.

양성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한겨레21>의 사진들을 보면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보도사진이라고 해도, 판에 박힌 사진들만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일간지와는 다르게 주간지는 좀더 신선하고 자유롭게 연출할 필요가 있는데, 그걸 해달라고 주문한다면 너무 과욕인가요?

이선숙: (Y세대의 입장을 대변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우리 과에는 <한겨레21>을 읽고 비평하는 모임도 있어요. 잡지가 좀더 분명한 자기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들 하는데, 요즘 대학생들은 어떤 진보매체보다 <한겨레21>을 더 많이 읽어요. 너무 치우치면 거부감을 느끼는 거죠. <한겨레21>은 진보적이면서도 다양한 정보를 많이 준다는 점이 좋아요.

이혜영: 과학면이 부족합니다. 우리 가족은 ‘한겨레 가족’이에요. 창간주주이기도 하고요. 전 <한겨레21>뿐만 아니라 다른 잡지들도 다양하게 구독하고 있어요. 그런데 과학을 전공하고 연구소에서 일하는 제 입장에서는 과학면을 너무 소홀히 하고 너무 인문학쪽으로 치우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생활과 과학을 유리시키는 건 아닌가요? 정신과학 같은 부분을 빠뜨리지 말고 실어주었으면….

회의가 길어지면서 자리를 근처 식당으로 옮겼다. 식탁에 자리잡자마자 독자편집위원들은 너무 친해져 버렸다. 언제나 사석은 공석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녹음기를 챙겨오지 않은 건 담당기자의 큰 실수였다. 지하철공사 노동조합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이은주씨는 왜 노동문제를 심도있게 다루는 기사가 줄어드느냐고 호통을 쳤고, 강화수씨는 점점 세계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와 결부돼가고 있는 시대조류를 지적하며 새로 신설되는 ‘아시아 네트워크’에 큰 기대를 표시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홍윤기씨는 <한겨레21>의 디자인을 칭찬하면서도 표지가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독자편집위원회 운영 방향의 가닥도 이 자리에서 잡혔다. 다른 독자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일단 임기는 6개월로 정했다. 1년 임기를 주장했던 홍윤기씨는 “내가 <한겨레21>에 너무 할말이 많은가 봐요”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문진화씨는 “남편이 학교 다닐 때 교지를 만들었는데, 이번에 독자편집위원이 됐다고 하자 정말 부러워했다”고 전했다. 이에 질세라 이은주씨도 자신의 교지 편집 경험을 꺼내며 “독자편집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한겨레21>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공부해야겠어.” “이선숙씨처럼 줄 그어가며 읽어야지.” 이 ‘못 말리는 독자’들은 다음 회의에는 산더미 같은 모니터 자료를 가지고 오기라도 할 생각인가보다. 독자편집위원회가 <한겨레21>의 소중한 ‘골칫거리’가 될 것 같다.

유현산 기자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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