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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다음은 평화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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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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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진실위원회 건축가 정기용씨 “박제된 기념관은 짓지 않겠다”

사진/ 평화 역사관을 준비하는 건축가 정기용씨.
베트남 중부 빈딘성 곳곳에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무덤이 흩어져 있다. 살아남은 이들은 돈이 생기면 무덤부터 바꾼다고 한다. 처음에는 파묻은 곳을 꽃으로 표시해두고, 돈이 조금 모이면 야트막한 봉분을 쌓고, 조금 더 모이면 이 지방 특유의 네모난 돌성을 쌓는다. 무덤은 마당에도 뒤뜰에도 고샅에도 있다. 깐븜지역 민간인 학살 당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따이선사 당 서기장 응웬 떤 런은 한국의 방문객들에게 “어머니와 여동생의 무덤에 향을 피워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표정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열다섯살에 끔찍한 악몽을 겪은 이래 혼자서 상처를 삭여오느라 그는 표정을 상실했다.

“한 걸음이 두 걸음, 세 걸음을 가능케 한다”

사진/ <한겨레21> 독자들의 성금운동을 기념하는 문구가 새겨진 공원 내 ‘진실과 우정의 둥지’ (이용호 기자)
박물관과 기념관에 쌓여 있는 기록을 빼면 도시와 공단지역에서 전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격전지에 가까워질수록 전쟁의 흔적은 도드라진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의 몸과 영혼에 새겨진 수많은 빗금에, 경험을 증언하는 목소리에, 동네 곳곳에서 만나는 무덤에 남아 있다. 총들고 싸운 전사의 가족은 위로금을 받지만, 자기 몸 지킬 무기 하나 없이 떼죽음을 당한 민간인들의 수는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당 인민위원회는 이들을 관리하지만 이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지는 못한다.


“한국을 찾았을 때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을 만났습니다. 5천여명이 죽었고 10만여명이 부상을 당했고 수많은 고엽제 피해자들이 고통 속에 있습니다. 참전군인들과 저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상처를 꺼내 물에 깨끗이 씻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상처를 한쪽에 치워놓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부터 서로 나눠야 할 것입니다.” 한-베 평화공원 준공식 다음날인 1월22일,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관계자들을 만난 응웬 탄 꽝 푸옌성 공산당 서기장은 위와 같이 말했다. <한겨레21>의 베트남전 캠페인은 ‘한-베 평화공원’ 준공으로 역사의 진실을 이해하고 화해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강정구 대표는 “한 걸음이 두 걸음, 세 걸음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베 평화공원의 의미를 평가했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준비하는 평화역사관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공간을 이용할 것인가에 따라 밑그림이 달라질 것이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는 푸옌성 응웬 탄 꽝 서기장을 만난 자리에서 부지 선정의 세 가지 가능성을 타진했다. 한-베 평화공원 안에 세우는 방법, 주민들의 일상과 가까운 장소에 짓는 방법, 기왕의 건축물을 사들여 고쳐쓰는 방법 등이다.

역사·건축학자 공동 심포지엄 제안

평화역사관 계획에 참여하고 있는 건축가 정기용씨는 “박제된 기념관을 짓지 않겠다”고 말한다. “건물의 모양이나 외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래 지속된 내용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 전쟁을 오직 ‘기억’으로만 접속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이 자기 지역의 특성을 지켜나갈 지혜와 힘을 키울 공간이어야 한다. 작지만 알찬 어린이 도서관일 수도 있고 동네 주민들이 골고루 이용할 다목적 문화공간일 수도 있다.” 정씨는 그 일환으로 1월24일 호치민시에서 열린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와 호치민 역사학자와의 만남에서 양국의 역사학자·건축학자들의 공동 심포지엄을 제안하기도 했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는 국내 활동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차미경 공동집행위원장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재원 마련에서부터 각계 다양한 사람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베트남전이 한국인들에게 어떠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통해 진실을 찾고 알려나가겠다”고 밝혔다.

푸옌=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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