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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생도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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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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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트남에 가야 하는 이유’에 안정애 독자 뽑혀… 공원 준공식 때 독자대표로 인사말

‘내가 베트남에 가야 하는 이유’ 공모에 10여명의 독자가 참여해주셨습니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과 이유가 있었기에, 단 1명을 뽑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성금운동에 제자들과 함께 참여했다가 참전군인들의 집단적 항의방문을 받고 충격을 받은 여교사도 있었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아버지를 대신해 화해의 첫걸음을 내딛겠다”는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한겨레21>은 면밀한 심사 끝에 안정애 독자를 대상자로 선정했습니다. ‘한-베 평화공원’ 준공식에 참여하게 될 안정애 독자는 준공식에서 독자대표로 인사말을 하고, <한겨레21> 445호에 베트남 방문기를 쓸 예정입니다. 안정애 독자의 응모글을 요약해 싣습니다.

사진/ ‘한-베 평화공원’에 세워지는 생명의 솟대. 베트남 인부들이 밧줄과 기구를 이용해 완성된 솟대를 세우고 있다.
‘열혈독자’(1999년부터 꾸준히 정기구독을 하고 있고 성금모금 캠페인 초기 참여자인바, 이 표현에 무리가 없을 듯), 다음과 같이 ‘베트남에 가야 하는 이유’를 아뢰는 바이오.

첫째, 여성입니다.


‘전쟁=남성, 평화=여성’ 등식이 과연 만인에게 이의 없이 받아들여질까는 의문입니다만, 유사 이래 세계질서가 남성 위주로 유지돼왔고, 그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굳이 ‘젠더화된 국제정치질서상의 여성의 소외’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전쟁이 만연한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여성이 최대 피해자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여성이기에, 공부하는 분야기에…

이젠 세계질서가 힘있고 파괴력을 지닌 그룹에 의한 일방적 주도가 아니라 여성을 포함한 못 가진 자, 힘없는 자들을 위한 평화를 외치는 세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여성은 파괴보다는 보존을, 수직적인 것보다는 수평적인 것을, 내치기보다는 포용하는 힘을 지녔기에 남성보다는 평화라는 실체에 훨씬 더 근접해 있습니다. 평화공원을 바라보는 눈도 남성보다는 평화로 상징되는 여성의 눈길이 적격인 줄 아뢰오.

둘째, 공부하는 분야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군 및 군사사 관련 공부를 계속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베트남전은 좋은 연구 테마가 됩니다. <한겨레21>에 보도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양민학살 사건은, 그동안 단편적으로 떠돌던 얘기들이 구체성을 띠면서 제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군사사 연구기관에서 노근리 사건으로 정신없이 미군의 한국전쟁 양민학살 사건 관련 1차 자료를 뒤지고 있던 저는 엄청난 혼란과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한국전에 개입한 미군에게 열등종자로 취급받으면서 “흰 옷을 입고 있어서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이 안 되므로 무조건 사살하라”는 상부 명령에 의해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총탄에 스러져야 했던 우리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한다는 명분이 순간적으로 빛을 잃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제대로 씌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치부를 가린다고 해서, 왜곡한다고 해서 그 역사가 남의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엄연한 우리의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가야겠지요.

<한겨레21>의 보도는 제게 왜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한국전에서의 미군의 만행과 똑같은 일을 저질렀는가를 생각하게 했고, 이는 일제 잔재가 완연했던 한국군 창군부터의 인적 구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잠정 결론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조금 더 연구해볼 주제입니다.

평화 선포하는 마당에 증인으로

셋째, 제 자식들과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산 경험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한국 사회가 이젠 고질적인 한국병에서 벗어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는 올바르고 깨끗하고 자부심을 느낄 역사를 물려주고 또 가르치고 싶습니다. 힘있는 자에 의해 휘둘리는 현재의 세계질서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한국전쟁에서 강대국에 의해 유린당했으면서도 우리는 왜 똑같은 짓을 다른 나라에 가서 했는지, 전쟁이 무엇이며 왜 전쟁이 없어져야 하는지, 우리 문제와 관련하여 이 땅에 더 이상의 미선이 효순이가 왜 없어야 하는지를 먼저 두 딸에게 설명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관학교 생도- 에게 체험담이 필요합니다. ‘학생 반 군인 반’의 특수 신분인 그들에게 ‘한-베 평화공원’ 준공식 참여담은 생생한 시청각 교육이 될 것입니다. 불가피성이 강조되긴 합니다만, 이들 수업 시간이 주로 전쟁 위주의 이론이어서 평화를 주제로 한 수업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또한 베트남전은 생도 선배들이 개입된 것이므로, 될 수 있으면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다시는 오욕의 행위를 하지 않도록 거울로 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 이유.

역사의 현장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의 전쟁·학살·가난·아픔이 없는, 화해와 웃음의 악수, 평화를 선포하는 잔치마당에 역사의 증인이 되어 작은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안정애/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 연구원·인하대 육사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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