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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정의 기쁨을 노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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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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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미래 다짐한 ‘한-베 평화공원’ 기공식, 푸옌성 주민 400여명의 진심어린 환대 속 대성황

사진/ 최학래 사장이 <한겨레21>독자들이 모아준 성금을 공원 건립 실무부서인 푸옌성 문화통신 청장 응웬 반 히엔씨에게 증정한 뒤 함께 손을 치켜들었다.
스멀스멀 다가오던 먹구름이 비를 뿌렸다. 하늘에선 포효하듯 천둥까지 쳤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보며 사람들은 상쾌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야외 강변에서 점심을 먹다 자리를 옮기는 번거로움도 상관없었다. 그들 중 한명이 말했다. “이건 오늘 우리들의 만남을 축하해주는 ‘우정의 비’다.”

아침에도 그랬다. 왜 하필 버스가 행사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빗방울이 떨어졌을까. 그로 인해 예정된 행사는 1시간을 넘겨서 시작해야 했다. 베트남에 체류하던 4일 동안 행사 직전과 직후에만 딱 한번씩 내려준 비. 한달만에 내렸다는 그 비에는 정말 우정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담긴 걸까.

감동 증폭시킨 문화적 이벤트


4월24일 아침 7시30분. 한국대표단을 태운 버스는 푸옌성 투이호아현의 한 호텔을 출발했다. 이어 추수하는 들판이 그림처럼 펼쳐진 작은 도로로 들어섰다. 호치민에서 나짱까지 비행기로 1시간. 나짱에서 승합버스로 투이호아현까지 3시간 반. 이제 여기서 중호아히엡사에 있는 행사장까지 40분을 더 가야 한다. 볏단을 실은 우마차와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삿갓을 쓴 농부와 등교하는 꼬마들이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30분을 달려 중호아히엡사 입구에 이르자 한국대표단 일행을 반갑게 맞는 거리의 빨간 플래카드. 이곳에 온 목적을 선명하게 말해주는 플래카드. “평화공원 건립을 위한 기공식에 참여해주신 각 대표자 여러분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사진/ 첫삽을 뜨는 모습. 왼쪽에서 여럿번째가 최 사장. 그 오른쪽이 응웬·탄 쾅 푸옌성 공산당 서기장
한겨레신문사와 푸옌성이 공동주최한 ‘한-베 평화공원’(Han-Viet Peace Park) 기공식은 늦어졌다. 갑자기 내린 비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비에 ‘맛이 간’ 음향기계 탓에 30분을 더 끈 뒤 10시쯤 시작됐다. 하지만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푸옌성 문화예술단 남녀가수들과 무용수들의 다채로운 공연은 이 행사가 단순한 ‘삽질’이 아닌 상대방의 문화를 껴안는 만남이라고 웅변하는 듯했다. 이전에도 한국 정부나 참전군인 관련단체의 여러 공식행사가 베트남 중부5개성(한국군이 베트남전 당시 작전했던 지역으로 쿠앙응아이, 쿠앙남, 푸옌, 빈딘, 칸호아. <한겨레21> 보도 이후 한국 정부는 학교 40개와 종합병원 5개를 짓고 있다)에서 있었지만 이런 화려한 이벤트가 식전행사로 장식된 적은 없었다.

본행사도 대단히 치밀했고 문화적이었다. 푸옌성 소년소녀군악대의 연주는 행사 흐름을 윤기 있게 해주었으며,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그 의미에 적절히 맞게 흘러나온 <미안해요 베트남> 음반의 비감한 선율은 감동을 증폭시켜주기에 충분했다. 한국 쪽 참석자들은 “역시 예술인 출신이 모인 문화통신청 사람들이라 다르다. 감각이 돋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문화통신청의 부청장 응웬 응옥 쾅(45)씨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평화공원 기념노래 <우정의 기쁨을 노래하자>를 발표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사진/ 기공식에는 푸옌성 각급 간부들과 베트남전 생존자, 마을 주민·학생 400여명이 자리를 꽉 채웠다. 푸옌성 문화예술단 가수들의 노래공연은 행사에 흥을 돋워주었다.
그러나 한국 대표단이 가장 크게 확인한 것은 푸옌성 쪽의 ‘진심’이었다. <한겨레21>의 베트남전 진실보도와 그로 인해 겪은 갖가지 우여곡절과 사연들이 워낙 알려져 있는 터라, 푸옌성 주민들은 아주 오래된 친구들을 맞는 것처럼 한국대표단을 환영해주었다. 특히 그들은 이곳에서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학교와 병원 건립도 오로지 <한겨레21>의 진실보도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각 기관의 간부와 베트남전 생존자, 주민·학생 등 400명의 참석자들은 상대적으로 길었던 한겨레신문사 최학래 사장의 인사말을 지루한 표정 없이 진지하게 경청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그들의 얼굴에서 ‘동원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실 이번 기공식은 1주 반 만에 급조된 행사였다. 그럼에도 그 어느 행사보다 가장 성대하게 아무런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건 실무자들이 진심의 힘으로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한 결과였다(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식행사가 얼마나 번거로운 승인절차 과정을 거치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미국은 이 전쟁 이해 못한다”

사진/ 기공식 행사장 입구에 세워진 빨간 플래카드. 한국대표단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지나간 일들은 한켠에 접어두세/ 인간으로 새로 서기 위해 서로 도우세/ 노란 피부, 붉은 피를 가진 이여/ 다함께 아시아의 동반자가 되세/ 수많았던 질곡의 날들을 지나/ 오늘 베트남과 한국 두 나라의 간극을 이어/ 우리 다함께 단결의 노래를 부르세.”

생존자 대표로 인사말을 한 쩐 반 호아(70)씨가 직접 지어 읽은 시다. 그는 “바로 이 지역에서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많이 일어났지만 이제 우리는 우애와 선의를 체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진/ 최학래 사장이 베트남전 생존자들에게 선물을 증정하고 있다.
그 우애와 선의는 오찬장에서도 이어졌다. 푸옌성 내 권력서열 1위라 할 수 있는 응웬 탄 쾅 푸옌성 공산당 서기장(전 푸옌성 주석)은 한국과 베트남이 베트남전 당시에도 적이자 친구였다고 말했다. “한국군은 상상할 수 없이 험악한 곳에서 작전했다. 모기와 곤충이 우글거리는,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봐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을 한국군이 행군해왔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 미군들은 잠을 잤다. 그래서 나는 이 전쟁을 이해할 수 있는 건 한국과 베트남뿐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절대 이 전쟁을 이해할 수 없다.”

사진/ 행사에 참석한 학생들.
최학래 한겨레신문사 사장은 살아 있는 자는 역사를 증언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일부 참전군인들이 우리 신문사를 습격하고 불질렀다. 그들은 나한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경찰이 주모자를 체포했다. 나는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도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는 과거다. 하지만 과거라고 잊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게 있다. 누군가 말하지 않으면 인류는 반성할 기회를 잃는다.”

두 사람은 건배를 제창했고, 누군가가 베트남어로 소리쳤다. “못짬 번짬!”(원샷!) 응웬 탄 쾅 서기장은 잔을 비우고 말했다. “나는 오늘 한겨레 사람들을 한 사람도 못 만났다. 친구들만 만났다.”

사진/ 덜 알려져 더욱 천연의 모습을 간직한 푸옌성의 관광지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롱 투이 해변, 키로강의 야경, 다디아 절벽. (푸옌성 관광상공청 제공)

푸옌=글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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