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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용기있는 고백, 그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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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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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군인들의 협박에 이민까지 생각한 김기태씨… 가슴아픈 가족사연 밝힐 수 없는 이도

(사진/지난 3월 부하의 무덤가 묻혀있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한겨레21> 취재진한테 베트남전 작전상황을 설명하던 김기태씨)
“어, 그래. 앞으로 월남전 관련해 좋은 기사 있으면 어떻게 하나?” 지난 8월31일 저녁, 베트남전 양민학살 캠페인을 끝낸다고 전하자 그는 웃으며 물었다. 6개월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흰 머리카락이 늘었다. 예비역 해병대령 김기태(65)씨. <한겨레21> 305호 표지이야기에 그의 증언이 실린 뒤 참전군인들의 위협과 협박 속에 많은 고통을 겪었던 그다. 그 무렵에는 “이민이라도 가야겠다”고 심경을 토로했지만 이제는 평온함을 되찾았다. “또 새로운 내용 나온 것 있어?” 맹호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사살한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긴 지난호(324호)를 건넸다. “아, 그랬구만. 그런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이 있었구만.”

그때 그 기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베트남전 양민학살 캠페인은 참전군인들의 용기있는 증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베트남 피해 주민들의 증언만 있었다면 반쪽에 그쳤을 것이다. 참전군인들은 민간인 사살과 관련한 증언 이외에도 베트남에서 겪은 많은 일을 취재진한테 전해줬다.


“그때 기자들을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어. 아마 다 목격했을 거야.” 베트남전 이야기를 한참 하다 김기태씨가 또 ‘기자’ 이야기를 꺼냈다. 종군기자. 많은 기자들이 한번쯤 그리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의 기자들도 베트남전을 취재했다.

1966년 11월10일, ‘용안작전’ 둘쨋날 7중대원들이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푹빈촌 주민들을 사살한 바로 그날, 한국의 종군기자 2명이 7중대와 함께 있었다. “용안작전 나갈 때부터 기자 2명이 우리 중대를 따라왔지. 중대본부와 함께 가기도 하고 일선 소대를 따라다니며 사진 찍고 취재도 했지.” 김씨는 푹빈촌을 공격했던 날 저녁,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던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낮에 탄약을 거의 다 써버려 대대에 탄약 보급을 요청했지. 그때 머리를 땅에 박고 있던 기자가 ‘실탄 여기 있습니다’라고 해. 보니까 권총 탄알 몇발을 손바닥에 펴 보이더라고.”

당시 종군기자들이 푹빈촌 사건을 분명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취재진은 김씨의 기억에 따라 당시 현장에 있었을 법한 기자들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어떤 이는 현장에 없었다고 했고, 어떤 이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아직까지 한국군의 민간인 사살사건을 담은 사진은 한장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 통제가 극심했던 탓도 있다.

김씨는 “월남에서 대승하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한편으로는 유골함과 부상자들이 계속 들어왔다”면서 “한국에서 부모들이 자식을 데리고 가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말한다. 면회 온 부모가 아들을 화장실로 데려가 미리 준비한 사복으로 갈아입혀서 나가버리는 일이 7중대에도 있었다고 한다. 자식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것보다 탈영병으로 감옥에 있다 몸 성하게 나오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작전을 할 때 가급적이면 부하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전술을 썼지. 누구나 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고, 나도 베트남에 올 때 우리 부모가 부적을 써 내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어.” 당시 한국의 신문은 파월을 꺼려한 일부 병사들이 일본으로 밀항한 사건을 일본 신문을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탈영병이 속출하던 시절

당시 해병으로 참전했던 이들은 모두 ‘킬러중대’(310호)에 관한 얘기를 했다. 정아무개(55·해병 167기)씨도 취재진에 전화를 걸어 “혹시 5중대를 어떻게 불렀는 지 압니까?”고 먼저 물을 정도였다. ‘킬러중대’의 ‘킬러2호’로서 그가 베트남에서 직접 경험한 일 가운데는 너무 잔혹해서 보도하지 않은 사건도 있었다. 비오는 날, 인천의 한 허름한 술집에서 취재진은 그를 두번째 만났다. 다음날 아침 8시께 그가 전화를 했다. “나 밤새도록 술마시고 지금도 그러고 있어.” 그리고 정씨의 폭음은 며칠간 계속됐다. 베트남전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은 스스로 상처를 덧내는 일이었다.

306호 표지이야기에는 쿠앙남성 퐁니촌 민간인 사살사건에 대한 청룡부대 1대대 1중대 소대장들의 증언이 실렸다. 이 보도가 나간 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헌병대 수사계장 성아무개(63)씨가 청룡여단이 퐁니촌 사건을 은폐했다는 사실(310호)을 증언했다. 그는 그런 은폐를 해병대의 엄정한 군기와도 연관지어 설명했다. “내가 수사계장할 때 하극상 사건은 단 한건뿐이었다.” 성씨는 그러면서 “나도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은 것이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취재진한테 전화를 건 것은 가슴 아픈 가족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캠페인을 마감하는 지금에도 성씨는 그 사연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한겨레21>에 용기있게 증언을 했던 참전군인들도 여느 참전군인들처럼 밝히기 싫어하는 기억과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고 있다.

황상철 기자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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