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살다 간 베트남 종군작가 쭈깜퐁의 <전쟁일기>에서 만나는 한국군의 족적
전쟁의 포화 속에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리라 믿었던 한 전사의 일기장이 30년 만에 공개됐다. 일기장의 주인공은 베트남의 종군작가 쭈깜퐁.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작가로, 종군기자로, 전사로 활약했던 쭈깜퐁의 일기장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최후의 격전을 벌였던 남베트남 정부군의 손에 들어가 소멸의 위기를 면했다. 구사이공 군대 정치국에 4년 동안(1971∼75) 보관됐던 그의 일기장은 남베트남 병사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호기심에 의해 읽히다가 수많은 감화를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쭈깜퐁의 일기는 1967년 7월11일에 시작돼 1971년 4월26일까지 4년 가까이 계속된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무대는 청룡부대 주둔지였던 호이안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중부 쿠앙남성과 쿠앙응아이성 일대. 그의 부대는 한국군과 꼬리를 무는 교전을 잇따라 벌인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쭈깜퐁의 <전쟁일기>(베트남 문학출판사) 첫장을 여는 순간부터 한국군의 족적과 마주하게 된다.
거칠고 투박한, 그러나 숨막히는…
1967.7.11 레 강을 건너서, 남조선 군대가 막 소탕작전을 마친 지역을 지난다. 집이고 수목이고 남김없이 불탔다. 이 길은 하탄에 주둔하고 있는 적들이 수시로 폭격을 퍼붓는 곳이다. 1967.7.16 길은 뜨겁고 너무 고요해 약간 망설이게 된다. 단지, 어느 난폭한 남조선 병사가 손이 근질근질해 총이라도 휘둘러댈까 걱정이다. 이들과 같이 야만적인 적들은 선량한 양민을 쏘는 일쯤은 잘못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곳도 예전엔 마을들이 밀집하고 수풀이 무성했으리라. 연초 그들이 습격해 지나간 뒤에는 모두 불타고 수많은 폭탄구덩이들만 움푹움푹 패어 있다. 일기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쭈깜퐁조차도 자신의 일기가 먼 미래에 책으로 출간돼 만인에게 읽히리라곤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정서되지 않은 그의 일기는 거칠고 투박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래서 그의 생동하는 문체는 우리를 더욱 숨막히는 긴장감 속으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1969.3.1 꾹의 옷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가슴은 잘게 썰려 있었으며, 머리는 잘려나갔다. 안의 얼굴은 산산조각 쪼개지고, 눈알이 뽑혀져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흥은 얼굴 한가운데가 칼에 찔려 있었다. 융은 가슴에 한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슬픔에, 억울함에, 분노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그 소녀들은 나를 살리기 위해 죽었다. 쭈깜퐁의 본명은 쩐띠엔. 1941년 8월12일 쿠앙남성의 호이안에서 태어났다. 1964년 하노이종합대학 국문학과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생에 선발됐으나 외국 유학의 길을 포기하고 남부 투쟁의 길을 선택한다. 베트남 통신사 단기 훈련과정을 수료한 뒤 그는 통신사 기자로서 전장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활약했다. 발로 뛴 방대한 전투자료의 보고 쭈깜퐁의 <전쟁일기>는 베트남전이 최정점에 이르렀던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남북의 교전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중남부 전역을 아우르는 방대한 전투 자료의 보고이다. 또한 도시는 물론 농촌의 가장 작은 행정단위인 촌과 사 단위의 부락까지 그가 직접 발로 뛰며 체험한, 전장의 살아 있는 기록이다. 1967.8.10 남조선 병사들이 막 습격해와 마을을 온통 불태워버렸다.그들은 칠팔십세 노인 두면(고령으로 미처 달아나지 못했다)을 체포,땅굴에 몰아넣고는 볏짚을 덮어 불태웠다. 1968.3.29 박정희 용병들이 소탕작전을 펼쳤던 쑤옌쩌우 지역을 지난다. 그들은 빈꾸앙, 선틴, 빈선에서 저질렀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동포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새 봉분들이 줄을 이어 누워 있고 한움큼의 향이 꽂혀 있는 두개의 대나무 관이 무덤마다 그 양옆을 지키고 섰다. 묘지에는 아직도 대나무 의자가 군데군데 널려 있다. 이제 막 세워진 듯한 증오비도 서 있다. 비에는 학살당한 동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는 29명의 그 소박한 이름들을 일일이 세어본다. 1968.4.5 오전 내내 1대대의 남조선 군대 규탄대회에 참석했다. 남조선 병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성토하자 전 부대원들이 몹시 격동되었다. 부대원 가운데 홍, 닌, 떤 동지들의 경우엔 가족 전원이 남조선 병사들에 의해 몰살당했다. 성토가 끝난 뒤, 중대별로 적 섬멸 목표치 등록이 있었고, 많은 동지들의 개인 의견 발표가 이어졌다. 정치국장 동지는 붉게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목청을 높였다. 병기조의 띠엔은 남조선 도당 타도대회가 진행되는 내내 쪼그리고 앉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1971년 4월26일, 그가 쓴 마지막 일기의 맨 끝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0시, 두대의 전투기가 다가와 폭격을 퍼붓고, 보병들을 쏟아냈다. 그들이 20밀리 총격을 가하며 밀고 들어오고 있다.” 쭈깜퐁은 더이상 쓸 수 없는 최후의 상황이 닥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더이상 붓을 쥐고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총으로 바꿔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5월1일 새벽, 쭈깜퐁은 쿠앙남성, 유이떤 지역의 한 비밀땅굴에서 그의 부대원들과 최후의 순간을 맞는다. 1975년 4월30일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직후 쿠앙남성 작가회의에 구사이공 군대 정치국의 한 하사관이 찾아와 쭈깜퐁의 일기장을 전하고는 서둘러 사라진다. 1984년 쿠앙남 작가회의에서는 쭈깜퐁 생전의 작품들을 모아 <차가운 정월>이라는 유고집을 펴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2000년 그의 일기장이 다시 책으로 출간되었다. 호치민= 구수정 통신원 chaovietnam@hotmail.com

(사진/쭈깜퐁의 <전쟁일기>. 그의 일기장은 적군인 남베트남 병사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호기심에 의해 읽히다가 수많은 감화를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진다)
1967.7.11 레 강을 건너서, 남조선 군대가 막 소탕작전을 마친 지역을 지난다. 집이고 수목이고 남김없이 불탔다. 이 길은 하탄에 주둔하고 있는 적들이 수시로 폭격을 퍼붓는 곳이다. 1967.7.16 길은 뜨겁고 너무 고요해 약간 망설이게 된다. 단지, 어느 난폭한 남조선 병사가 손이 근질근질해 총이라도 휘둘러댈까 걱정이다. 이들과 같이 야만적인 적들은 선량한 양민을 쏘는 일쯤은 잘못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곳도 예전엔 마을들이 밀집하고 수풀이 무성했으리라. 연초 그들이 습격해 지나간 뒤에는 모두 불타고 수많은 폭탄구덩이들만 움푹움푹 패어 있다. 일기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쭈깜퐁조차도 자신의 일기가 먼 미래에 책으로 출간돼 만인에게 읽히리라곤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정서되지 않은 그의 일기는 거칠고 투박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래서 그의 생동하는 문체는 우리를 더욱 숨막히는 긴장감 속으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1969.3.1 꾹의 옷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가슴은 잘게 썰려 있었으며, 머리는 잘려나갔다. 안의 얼굴은 산산조각 쪼개지고, 눈알이 뽑혀져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흥은 얼굴 한가운데가 칼에 찔려 있었다. 융은 가슴에 한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슬픔에, 억울함에, 분노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그 소녀들은 나를 살리기 위해 죽었다. 쭈깜퐁의 본명은 쩐띠엔. 1941년 8월12일 쿠앙남성의 호이안에서 태어났다. 1964년 하노이종합대학 국문학과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생에 선발됐으나 외국 유학의 길을 포기하고 남부 투쟁의 길을 선택한다. 베트남 통신사 단기 훈련과정을 수료한 뒤 그는 통신사 기자로서 전장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활약했다. 발로 뛴 방대한 전투자료의 보고 쭈깜퐁의 <전쟁일기>는 베트남전이 최정점에 이르렀던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남북의 교전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중남부 전역을 아우르는 방대한 전투 자료의 보고이다. 또한 도시는 물론 농촌의 가장 작은 행정단위인 촌과 사 단위의 부락까지 그가 직접 발로 뛰며 체험한, 전장의 살아 있는 기록이다. 1967.8.10 남조선 병사들이 막 습격해와 마을을 온통 불태워버렸다.그들은 칠팔십세 노인 두면(고령으로 미처 달아나지 못했다)을 체포,땅굴에 몰아넣고는 볏짚을 덮어 불태웠다. 1968.3.29 박정희 용병들이 소탕작전을 펼쳤던 쑤옌쩌우 지역을 지난다. 그들은 빈꾸앙, 선틴, 빈선에서 저질렀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동포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새 봉분들이 줄을 이어 누워 있고 한움큼의 향이 꽂혀 있는 두개의 대나무 관이 무덤마다 그 양옆을 지키고 섰다. 묘지에는 아직도 대나무 의자가 군데군데 널려 있다. 이제 막 세워진 듯한 증오비도 서 있다. 비에는 학살당한 동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는 29명의 그 소박한 이름들을 일일이 세어본다. 1968.4.5 오전 내내 1대대의 남조선 군대 규탄대회에 참석했다. 남조선 병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성토하자 전 부대원들이 몹시 격동되었다. 부대원 가운데 홍, 닌, 떤 동지들의 경우엔 가족 전원이 남조선 병사들에 의해 몰살당했다. 성토가 끝난 뒤, 중대별로 적 섬멸 목표치 등록이 있었고, 많은 동지들의 개인 의견 발표가 이어졌다. 정치국장 동지는 붉게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목청을 높였다. 병기조의 띠엔은 남조선 도당 타도대회가 진행되는 내내 쪼그리고 앉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1971년 4월26일, 그가 쓴 마지막 일기의 맨 끝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0시, 두대의 전투기가 다가와 폭격을 퍼붓고, 보병들을 쏟아냈다. 그들이 20밀리 총격을 가하며 밀고 들어오고 있다.” 쭈깜퐁은 더이상 쓸 수 없는 최후의 상황이 닥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더이상 붓을 쥐고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총으로 바꿔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5월1일 새벽, 쭈깜퐁은 쿠앙남성, 유이떤 지역의 한 비밀땅굴에서 그의 부대원들과 최후의 순간을 맞는다. 1975년 4월30일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직후 쿠앙남성 작가회의에 구사이공 군대 정치국의 한 하사관이 찾아와 쭈깜퐁의 일기장을 전하고는 서둘러 사라진다. 1984년 쿠앙남 작가회의에서는 쭈깜퐁 생전의 작품들을 모아 <차가운 정월>이라는 유고집을 펴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2000년 그의 일기장이 다시 책으로 출간되었다. 호치민= 구수정 통신원 chaovietnam@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