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6일 오전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승객 400여 명을 내버려둔 채 빠져나온 선장과 선원들을 두고 검찰과 변호인은 “탈출했다” “구조됐다”며 법정에서 맞서고 있다. 사고 당시 해양경찰 경비정 123정 등이 세월호 생존자를 구조하는 모습.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피고인 졸고 있다” “뉘우침도 없다” 검찰은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1900여 개의 증거목록을 제출한 데 이어 이날 600여 개를 추가로 냈다. 수사기록은 영상녹화물, 음성파일 등을 포함해 2500여 개로 늘었다. 피고인들은 검찰의 증거를 대부분 인정했다. 다만 해경과 검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했다. 이에 검찰 쪽은 단원고 생존 학생·교사, 일반인 생존자, 승무원, 해양전문가 등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재판장은 “세월호의 각 층별·선실별로 탑승했던 생존자들을 선정했으면 좋겠다”고 제언했다. 단원고 학생들의 증인신문 일정은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수업이 없는 7월 말~8월 초 2주간으로 계획했다. 6월30일에는 재판부가 세월호와 ‘쌍둥이 배’로 알려진 오하마나호에 대한 현장검증을 3시간20분간 실시하기로 했다. 이날 현장검증에 검찰과 피고인, 변호인은 물론 피해자 가족도 몇몇 동행하기로 했다. 변호인 쪽은 해경과 세월호의 원래 선장인 신아무개씨, 청해진해운 직원 등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특히 세월호에 탔던 필리핀인 가수 부부가 증인석에 앉는다. 이 부부는 사고 당일인 지난 4월16일 아침 8시52분 세월호가 병풍도 앞바다에서 멈춘 순간부터 오전 9시46분 출동한 해경 123정에 구조될 때까지 조타실에 있던 목격자다. 조타실 바로 뒤 침실에 있다가 선체가 30도 정도 기울자 조타실로 가 54분 동안 조타실 안의 상황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변호인 쪽은 “선원들의 (퇴선 명령, 변침) 진술이 엇갈리고 있어서 조타실에서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증인 신청 이유를 밝혔다. 증거·증인 채택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이 몇 시간째 반복됐다. 피고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가 눈을 감기도 했다. 그때 방청석에서 “(피고인이) 졸고 있다”고 소리쳤다. “뉘우침도 없고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고인들) 세워놓고 (재판)하면 안 되나?” “선장 얼굴을 똑똑히 못 봤다. 이 앞에 무릎 꿇게 해라. 왜 앉혀놓느냐?” 재판장은 “피고인의 법정 자리가 법률에 정해져 있다”고 설명했다. 피고인들에게는 “법정에 들어올 때 재판부에 목례 안 해도 된다. 하려면 방청석 쪽을 향하라”고 당부했다. 희생자 가족들, 직접 반박 “선장, 선원 등이 퇴선 명령을 했다” “세월호가 그렇게 급격히 침몰할 줄 몰랐다” “전문적 구호 장비와 지식을 갖춘 해경이 (승객을) 구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변호인들이 계속 주장하자 희생자 가족들이 직접 반박했다. 단원고 2학년9반 최아무개양 엄마의 말이다. “그렇다면 왜 선원들은 갑판 위에 다 올라가 있었나. 밖으로 나오도록 지도만 했어도 아이들은 다 살았다. 이런 변호를 용납할 수 없다.” 단원고 2학년3반 박아무개양 엄마도 말했다. “우리 아이와 10시11분에 5분간 통화했다. 처음에 엄마 부를 때는 울지 않았는데,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이가 울며 얘기했다. ‘엄마 울지 마. 금방 구조돼 나갈게.’ 그렇게 통화가 끊기고 6일 만에 물속에서 올라왔다. 휴대전화 동영상이 나왔다. 선원들은 9시28분 (해경과) 교신할 때 방송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동영상에는) 아이들이 방송 듣고 그런다. ‘이제 다 뛰어내리는 거야. 우리 살아서 보자.’ 이게 9시40분이 넘었다. 그 시각에 이준석씨 등은 이미 (세월호 밖으로) 나와 있었다. 왜 빨리 한두 명이라도 나가라고,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기들만 나왔는지 꼭 밝혀달라.” 두 번째 공판준비기일은 오후 4시께 끝났다. 재판부는 6월24일 오전 세 번째 공판준비기일을 연 뒤, 이날 오후부터 공식 재판을 시작한다. 첫 증거로 세월호 사고 당시 영상물(1시간 분량)을 조사할 계획이다. 광주=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