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외부터 한-일간 의견 차이 제작 방침이 정해지자 제작진과 극의 흐름을 이끌어나갈 주인공 선정 작업이 시작됐다. 한국 쪽에서는 독립영화 감독으로 민족문제연구소와 꾸준히 관계를 맺어온 김태일 감독이, 일본 쪽에서는 2001년 6월29일 시작된 야스쿠니신사 합사 취하소송 과정을 꾸준히 화면에 담아온 일본의 진보적인 영상제작단체 스피리통(SPIRITON)의 가토 구미코 감독이 작업을 맡기로 했다. 작품 제목은 불행한 과거에 ‘사요나라’(작별)를 고하고, 새로운 미래를 ‘안녕’으로 반긴다는 의미에서 <안녕, 사요나라>로 정해졌다. 다음 작업은 주인공 선정이었다. 한국 쪽 주인공은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는 이희자 태평양전쟁보상추진협의회장으로 하자는 데 양쪽 의견이 일치했다. 문제는 일본 쪽 주인공이었다. 초기 단계부터 한국과 일본 제작진들은 첨예한 의견 대립을 빚기 시작한다. 애초 일본 쪽 의견은 “일본에도 이희자씨와 같은 피해자를 섭외해 양쪽의 고통을 비교해보자는 것”이었다. 한국 쪽에서는 “그렇게 되면 비슷한 얘기가 겹치고 희망적인 미래의 얘기를 담는 게 어렵다”고 반대했다. 결국,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를 일본 쪽 주인공으로 뽑자는 데까지 이견이 좁혀졌다. 다음 문제는 섭외였다. 한국 쪽은 재한군인군속재판지원회에서 활동하는 후루가와 마사키가 좋다는 의견이었지만, 일본 쪽은 “그렇게 되면 운동단체의 자기 홍보의 장이 되고 만다”며 반대했다. 두 나라 제작진 사이에서는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김태일 감독은 “주인공과 스토리 라인을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간이 흘러 초조감이 극에 달했다”고 말했다. 작품은 애초 8월15일에 맞춰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동시 상영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 일정을 맞추려면 늦어도 3월까지는 스토리 라인이 완성돼야 하고, 6월까지는 촬영이 끝나야 했다. 시간은 흘러 4월 중순을 넘기고 있었고, 대안이 없었던 일본 쪽의 양보로 후루가와의 출연이 확정됐다. 극은 한국의 이희자씨와 일본의 후루가와가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을 설명하는 독백으로 시작된다. 이씨는 1943년 1월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그의 아버지 이사현씨는 일본 육군 군속으로 징용돼 1945년 중국의 계림 근처에서 부상을 당한 뒤 병사했다. 그와 모친은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다. 결혼해 아이를 키운 뒤 피해자단체 활동을 시작해 1992년 부친의 사망 기록을 확인하게 된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5년이 흐른 1997년이다. 1963년생인 후루가와는 1987년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 포위행동에 참가하면서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시민들을 고려하지 않는 고베 시정을 비판하다 다른 부서로 전직됐다. 둘이 첫 대면을 한 것은 고베 대지진으로 일본 열도가 충격에 빠졌던 1995년이다. 이희자씨는 “일본 사람들이 그만큼 나쁜 일을 저질렀으니 그런 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후루가와는 “그를 그렇게 분노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민에 빠진다. 둘 사이에는 한두 마디 위로의 말로 메울 수 없는 절망적 간극이 있었다. 영화에 담기지 않은 인터뷰 장면도 제작진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은 같았지만 방법을 두고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둘은 쉽게 마음을 모으지 못했다. 애초 계획은 일본 쪽 영상은 일본에서, 한국 쪽 영상은 한국에서 만든다는 것이었지만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태에서 작업은 방향을 잃었다. 한국은 큰 틀에 맞으면 작은 문제는 그냥 감수하며 넘어가는 데 견줘, 일본은 세부적인 부분까지 명확히 납득할 수 있어야 일이 진행됐다. 갈등이 폭발하기 직전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제작진은 모든 작업을 한데 뭉쳐 해나가기로 결정했다. 10여 명의 팀이 한국~일본~중국~오키나와를 오가야 했고 그 탓에 애초 4천만원 정도로 예상했던 제작비는 2억5천만원으로 껑충 뛰고 만다. 그 돈을 부담한 것은 한국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였고, 일본에서는 영화 제작에 찬성하는 시민들이었다. 작업은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6월 말 정도에 촬영이 끝났고 편집이 시작됐다. 한국어·일본어·중국어·영어가 뒤섞인 필름 테이프 200여 개가 제작진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두 나라 번역 자원봉사자들이 대거 투입됐다. 상영 전날인 8월14일까지 밤을 꼬박 새워야 했고, 아침까지 작업을 추가해 가편집본을 들고 상영회 날짜를 맞출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국회 의원회관, 일본에서는 도쿄, 오키나와 두 군데에서 상영이 시작됐다.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영화는 2005년 10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운파펀드상을 받기에 이른다. 영화에는 한-일 두 나라 피해자들과 진보세력의 목소리뿐 아니라, 일본 우익들의 목소리도 날것 그대로 숨쉬고 있다. <안녕, 사요나라>의 DVD판은 2년 가까운 후속 작업 끝에 지난 5월25일 완성됐다. 값은 3만8천원(우송료 포함 4만원)으로 정해졌고, 민족문제연구소(02-969-0226)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한국어·일본어·중국어·영어 자막을 선택해 볼 수 있고, 영화에는 담기지 않은 한-일 두 나라 전문가들의 귀중한 인터뷰 장면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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