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주민들의 짐을 모으다가 평화역사관을 만든 판화가 이윤엽씨… 노인들의 일생이 담긴 추억의 물건들과 세계의 연대 메시지로 채우다
▣ 평택=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8월11일 평택 대추리에서 만난 판화가 이윤엽(39)씨는 전기 대패질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머잖아 대추리 빈집들을 철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뭐든 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날은 7월25일이었다. 김춘석 국무조정실 주한미군대책기획단 부단장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대화만으로는 해결이 힘들다는 판단에서 기지 이전 사업의 차질 없는 추진을 위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머잖아 강제 철거를 시작하겠다”는 정부의 선전포고였다.
지친 주민들에게 새로운 힘을
이씨는 “처음엔 철거 예정인 빈집에 버려진 주민들의 짐을 한곳에 모아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5월4일 있었던 대추초등학교의 아비규환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건물에 남아 있던 주민들의 ‘추억’은 자루에 담겨 덤프트럭에 실렸다. 물건들은 빈 터에 버려졌고, 며칠 새 내린 빗물에 썩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망가졌다.
평택 대추리 평화역사관은 8월 20일께 문을 열 계획이다. 지킴이들이 박물관을 꾸미느라 정신이 없다.
“물건들을 한곳에 모아두자”는 이씨의 아이디어는 “물건들을 짜임새 있게 전시하자”는 사업 계획으로 발전했다. 지킴이들은 이 기회에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삶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을 세워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건물은 매일 저녁 7시30분 촛불집회가 열리는 농협창고 앞 2층집으로, 이름은 ‘대추리 평화역사관’으로 정해졌다. 긴 이름을 부담스러워하는 대추리 할머니들은 이곳을 그저 ‘민속촌’이라고 부른다. 작업은 7월 말부터 시작됐다.
박물관 조성 작업은 뜻밖의 결과를 몰고 왔다. 4년 가까운 싸움에 지친 노인들은 “내가 왜 싸워야 하나”라는 이유를 잊고 있었다. 주민들의 눈물과 호소는 “미국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공무원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주민들은 지쳐갔고, “싸움에 희망이 없다”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윤엽씨는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옛 사진을 뒤지던 노인들이 흔들렸던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은 그들이 벌거숭이로 태어나 학교에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따금 잔치를 벌이고, 이제는 나이 들어 환갑상을 받아 먹던 삶의 터전이다.
김지태 이장의 부친 김석경(78)씨는 “옛날 사진을 보니 힘들게 지냈던 그 시절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아직 공사 중인 ‘민속촌’에는 22살 앳된 얼굴의 김 노인과 20살 꽃같은 신부 황필순 여사의 결혼식 사진이 전시돼 있다. 김 노인은 “그때 우리 할멈이 참 예뻤다”며 웃었다. 그 옆에는 친구들과 함께 찍은 황 여사의 열아홉 ‘꽃띠’적 사진이 전시돼 있고, 다시 그 옆에는 촌스런 파란색 운동복을 입은 김지태 이장의 20대 시절 사진이 눈길을 잡아끈다. 파란색 운동복 오른쪽 가슴에는 유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선명한 88올림픽 로고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 왼쪽 벽에는 작고한 이주철 노인과 그 아들 이승환(56) 아저씨의 가족사가 펼쳐진다. 김석경 노인은 “어이구, 이게 언제 사진이야”라고 외치며 ‘대추리 흥농공사 기념’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진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사진을 찍은 날짜는 단기 4292년(1959년) 6월21일. 사진 속의 남자들은 멋진 양복과 중절모를 쓰고 사진기 앞에 나섰다. 이 사진은 1970년대 평택을 뒤흔든 대규모 토지 분쟁인 동백흥농계의 간척 공사가 끝난(혹은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사진으로 보이는데 자세한 사정은 확인할 수 없다. 서울에서 내려온 자본가들과 평택 농민들 64명이 계를 조직해 땅을 매립했는데, 도중에 ‘신’(新)계와 ‘구’(舊)계로 나뉘어 싸움이 붙었고, 중간에 끼인 농민들이 땅을 잘못 샀다가 큰 피해를 봤다.
판화 작품 판매소도 설치
1975년 군복무 중이던 이승환(56) 아저씨가 사모님 김정숙 아주머니에게 보낸 전보문도 눈길을 끈다. “너의 생일을 멀리서 축하하며 함께 즐기지 못하여 서운하다.” 우체국 소인은 1975년 3월14일로 찍혀 있고, 발신된 곳은 일산우체국이다. 그때 김정숙 아주머니는 서울 신길4동 232-2번지에 살고 있었다.
이윤엽씨는 평화역사관 1층의 주제는 ‘추억’이라고 말했다. 1층에는 노인들의 사진과 그들이 쓰던 삽·괭이·쇠스랑·호미 등의 농기구들과 재봉틀·책상 등 생활용품이 전시된다. 1층 큰방에는 지난 4년 동안의 투쟁 모습을 보여주는 각종 집회 사진들, 작은방에는 투쟁 자금 마련을 위한 이윤엽씨의 판화 작품 판매소가 설치된다. 작품은 한 점에 액자 값까지 합쳐 4만원에서 10만원까지 다양하다. 건물 2층에는 일본과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보내온 연대 메시지들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씨는 “대추리 싸움에 함께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며 “이메일과 편지를 보내오면 이를 모아 남은 공간을 채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메일은 대추리 지킴이 ‘챤파’(dczume@naver.com)에게, 편지는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회 사무실(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59-2 마을회관 1층, 451-802)로 보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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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운다] 이장 보고 온 날은 잠이 안와 집 철거해도 난 가만히 있을 거여, 죽일라면 죽이라고
▣ 김영녀(81)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63-2
마을 곳곳에서 11월에 김장할 배추를 키우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김영녀 할머니도 뜨거운 햇볕 아래 장에 나가 배추씨를 사오셨다.
배추씨 사왔어. 며칠 전에 트랙터로 로터리 쳤잖아. 두둑 만들고 비닐도 씌워놨어. 인자 비오고 나서 심어야지. 비 안 오면 못 심어. 시방 못 심어. 가을에 김장할 때 먹어야지. 조선 배추는 그 안에 뽑아먹고.
그 밭에 강낭콩도 심고 열무도 심었어. 이제 배추 이만하게 키워야지. 11월 중순경부터 김장해여. 근데 동네가 이렇게 된 걸 뭐. 같이 모여가메, 돌려가메 하는 거지. 내일은 누구네 하고 오늘은 누구네 하고. 번갈아 가며. 한 집에서 하고 이튿날은 또 다른 집에서 하고. 하루에 두 집 거 하는 날도 있고. 그렇게 맨날 해왔지. 올해도 해야지.
스물한 살에 천안으로 시집갔다가 여기 다시 들어온 겨. 지금은 딸이랑 증손녀랑 살아. 맨날 일하는 게 힘들지 뭐. 나 건강은 괜찮아. 풍 맞아서 다리가 시원찮으니께 끌고 다니는 거지, 아픈 데는 없어. 우리 엄니도 여기서 태어나고 나도 여기서 태어나고 그랬어. 어릴 때는 고무줄 같은 거 놀고. 뭐 고무줄이 어딨어? 사내끼 꼬아서 고무줄같이 논 거지. 각시놀이 하고. 수수깽이로 각시 모양 만들어서 머리 땋고 그랬지. 우리 아버지는 충청도에서 태어나셨나, 몰러. 나도 몰러. 아버지 일찍 돌아가셔갖고 잘 몰러. 영감은 죽은 지 23년 됐어. 병들어 죽었어. 폐암으로.
어제는 이장(구속된 대추리 이장 김지태) 보고 왔어. 멀쩡한 놈, 죄 없는 놈 가둬놓고. 아휴, 천불이 나. 열나고. 걔 보고 온 날은 밤새도록 잠이 안 와. 걔만 떠올라서. 내 조카여. 걔 애비가 내 동생이여. 우리 언니도 여기 살았는데 죽었어. 우리 언니가 83살이지, 살아 있으면. 우리 언니는 동네로 시집갔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 일 좀 해먹고 농사짓고 산다고 동네로 여의었는데, 아휴 이렇게 개 콧구녕같이 되었지. 내 또래 친구들도 많았는데 다 죽고 그랬어. 서울로 돈 받아서 나가고. 뭐 다들 하나둘씩 죽고 떠나고 그래.
집 철거해도 난 가만히 있을 거여. 나 죽일라면 죽이라고. 우리 집 지은 지 36년 됐어. 그해 봄에 지었어. 집 지을 때 방앗간에서 밥 해다 날랐어. 냉장고가 있어 뭐가 있어, 밥해 나르는 게 얼마나 힘들었다고. 이제 어떻게 될라나 몰라.
젊은 사람들 여기 못 들어오는 게 속상하지. 지금도 학생들 못 들어오고 있다잖아. 내가 갈 수가 있으면 쫓아가서 욕이나 퍼부어주고 오는 건데. 왜 안 들여보내주고 지랄이여. 그놈들 가만히 있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 그놈들이 길 막고 지랄하니께 욕하고 하는 거지. 그런 꼴 보면 욕 나오지 안 나와?
글·사진 진재연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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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땅 지키기] 일일찻집 놀러오세요 103,278,591원
8월11일 현재 1억327만8591원
8월18일 평택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일일찻집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동안의 투쟁 과정에서 불복종 운동을 벌이다 보니, 구속된 사람이나 벌금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주점이 열리는 곳은 8월18일 오후 3시 평택에 있는 노블레스 뷔페 웨딩홀입니다. 평택까지 오시기 불편하신 분들은 이윤엽 판화가의 판화 작품을 단돈 1만5천원에 구입하실 수도 있습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홈페이지(www.antigizi.or.kr)에 방문하셔서 ‘이윤엽 작가 판화 판매’ 배너를 누르시면 됩니다. 작품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 꽤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물론, 원하시는 곳까지 배달도 됩니다.
계좌이체 농협 205021-56-034281, 예금주 문정현
주관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한겨레21>
문의 평택 범대위(031-657-8111), 홈페이지 www.antigizi.or.kr,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59-2 마을회관 2층 (우편번호 451-802)
인천목요촛불(10만4870원) 심상우 남영애(3만원) 김유리(5만원) 내서여고3년(16만8630원) 권혁 이은생(5만원) 박동성 한창호(3만원) 유형규(10만원) 이상재(3만원) 이길숙(3만원) 김영석(1만3490원) 신혜숙 송기애(5만원) 마리(2만원) 아이들이살땅(5만원) 전미영(3만원) 이은영(2만원) 김은숙(2만원) 손주영(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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