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 살리기 캠페인] 우토로의 기억을 보존하자
등록 : 2005-06-14 00:00 수정 :
베를린 한복판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세우는 독일을 보라
강제징용 조선인 희생자의 역사를 복원하는 사업에 나설 때
▣ 김원/ 건축가·건축연구소 광장 대표
저는 오래전부터 ‘우토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관심 있게 보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곳을 있는 그대로 보존해 많은 일본 사람들과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 중에 강제로 징용당해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기고도 아무런 보상을 못 받고 ‘수고했다, 감사했다’는 말 한마디 못 들은 채, 전쟁이 끝난 지 60성상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나머지 인생조차도 그 땅에서 부대끼고 있는 희생자들과 그 2세, 3세들의 안타까운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또 이미 세상을 떠난 많은 우리 조상들의 혼령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장소와 시설을 이곳에 만들 수는 없을까를 생각한 것입니다.
우토로는 일본 땅에 마지막 남은 ‘조선인 게토(집단거주지)’입니다. 비행장을 건설한다고 동원해 끌고 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이 수도와 전기를 끊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버텨왔고, 미군부대가 들어오려고 할 때에는 맨손으로 맞서 그들을 물리쳤고, 아직도 토지반환 소송, 강제퇴거 명령, 그리고 일본 행정관서와 이웃 주민들의 냉대와 멸시 속에 살고 있답니다.
2차대전 때 세계 곳곳에 설치됐던 나치의 유대인 게토보다도 더 비참한 21세기의 이곳 현실은 참으로 추악한 일본인의 진정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독일인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지나치다 할 만큼 기회 있을 때마다 사과와 속죄는 물론 유대인들이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짓도록 허용할 뿐 아니라 베를린 도심지의 노른자위 땅을 내주고 건설비용까지 보조하는 것을 봅니다. 원래 베를린에는 다니엘 리베스킨트라는 유대인 건축가가 설계한 ‘유대인 2000년 기념관’이 있었습니다.
지난 5월 개관한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관. 가까이서 보면 단순한 사각형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수천개의 관처럼 보인다. (사진/ EPA)
그런데 거기에 더해 지난 6월10일에는 종전 60주년을 기억한다며 브란덴부르크문 인근 옛 히틀러의 총통부와 선전상 괴벨스의 집무실 건물, 그리고 그 밑에는 히틀러의 지하 벙커가 있던 중요한 자리에 약 6천평이나 되는 땅을 제공해 또 다른 유대인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설계한 ‘홀로코스트 추모관’이 개관됐습니다. 주검을 담는 관 모양의 콘크리트 덩어리를 2700개인가 늘어놓는 공사비로 2300만달러(우리돈 230억원)라는 큰 돈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 개관 소식을 듣고 도대체 파리, 비엔나, 세계 각국 도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념관을 짓고도 유대인들은 베를린 시내에 두개씩이나 추모시설을 갖는 것이 부러워서 우리도 일본 땅 도쿄 한복판에 “강제징용 조선인 희생자 기념관을 짓자”고 건축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만에 <한겨레21>에서 우토로 이야기가 나오니 무슨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듯 몹시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도쿄에 조선인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짓기 전에 우토로를 먼저 살리자, 한국 돈으로 60억원이라는 땅값을 모금하는 일에 우리가 나서보자고 이야기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지금 그곳에 사시는 분들이 그대로 살면서도 징용 희생자들의 상징으로 보존할 부분은 보존하고 작은 기념관을 지어서 역사 자료들을 전시할 수만 있다면, 이 땅 전체가 훌륭한 기념터가 될 것입니다.
일본 땅 한복판에 세워질 ‘태평양전쟁 조선인 징용 희생자 기념관’의 국제현상공모 사업을 벌여보는 건 어떨까요? 준비과정을 통해서도 세계 인류와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실상을 알리고 진실을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으로 괜찮은 아이디어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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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몰래 500만원 보내요”
[인터뷰]
10년 동안 푼푼이 모은 돈을 성금으로 쾌척한 주부의 ‘우토로 사랑’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남편 몰래 500만원 보냈어요. 10년 동안 푼푼이 모은 돈인데, 이럴 때 쓰라고 모인 것 아니겠어요?”
6월8일 서울에 사는 51살 주부가 우토로 성금으로 500만원을 쾌척했다. 그는 <한겨레21> 창간독자이며,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엄마다. 그 이상은 알려주지 않았다. 신원이 드러날 만한 정보를 더 알려주면, 매주 <한겨레21>을 꼼꼼히 챙겨보는 가족들이 눈치채기 때문이란다. 자랑스런 일이지만, 몰래 모은 돈이 아닌가?
“<한겨레21>의 기사를 보고 우토로 문제를 처음 알았어요. 일제시대 조선인들을 강제징용한 일본 정부와 잘못된 한-일협정으로 일본에게 변명거리를 준 한국 정부 때문에 주민들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거죠.”
작은 살림을 꾸리는 입장에서 500만원은 적은 돈이 아닌데, 어떻게 ‘결단’을 내렸냐는 질문에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국민들이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야지요. 그래야 일본 정부가 부담을 느끼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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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교실에서 우셨습니다”
[우토로 풍경]
어렵게 문을 연 조선인학교, 48년 일본 정부의 폐교령으로 문닫다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1941년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우토로에서 마을을 형성한 뒤 얼마 안 돼 조선인 학교를 열었다. 이국 땅에서 태어난 살아갈 자식들에게 조국의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강춘자(당시 58살)씨는 1991년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때의 학교 풍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빈집의 가건물이 교실이었고, 수업은 한국어로 이뤄졌습니다. 이과나 체육시간에도 선생님과 밖으로 나가 벌레나 개구리를 잡기도 하고 연못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어요. 몇년 지나자 민족학교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젊은 남자 선생님이 교실에서 책상을 두드리며 분해서 우셨습니다. 결국 모두 오구라 초등학교로 옮겼습니다. 저는 4학년에 편입했어요.”
우토로 조선인 학교는 1948년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교 폐교령’을 내린 이후에 문을 닫았다. 이때는 한반도 분단이 기정사실이 되고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우세가 점쳐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 정부가 공산주의 계열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조련)을 탄압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일본 문부성은 조선인 학교에 일본의 교육법규를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이를 지키지 않는 학교를 폐쇄했고, 고베·오사카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한신교육투쟁’이 일어났다.
조선인 학교가 없어지자, 우토로 아이들은 오구라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한때 조선인 특별학급을 운영하면서 우리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른 조선인 학교가 재개교한 것과 달리 폐교된 우토로 학교는 다시 교문을 열지 못했고, 오무라 학교의 조선인 학급도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1세대를 제외한 우토로의 2·3·4세대는 우리말이 서툴다.
1949년 조선인 학교가 폐쇄되자, 우토로 아이들은 오구라 초등학교에 다녔다. 오구라 학교 조선인 학급의 수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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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60년, 우토로에 새 희망을!”[일제 강제징용 조선인마을 우토로 살리기 캠페인]
현재 모금액 6월10일 오후 3시 현재 629만3천원
여러분이 내신 성금이 우토로 주민의 강제퇴거를 막을 수 있습니다. 성금이 한푼두푼 쌓일 때마다 우토로의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가 느끼는 부담은 커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우토로를 살려주세요!
계좌이체: 우리은행 1002-629-966152(예금주: 배지원·우토로국제대책회의)
인터넷 결제: 우토로국제대책회의 홈페이지(http://www.utoro.net)
주관: 우토로국제대책회의, <한겨레21>
문의: (02)713-5803, utoro@freechal.com
※인터넷 결제는 6월14일부터 가능합니다.
모금자 명단 익명 500만원, 박은지 3만원, 김보람 3만원, 한경화 3만원, 신은희 2만원, 김재민 5만원, 원주연 3만원, 김기천 5만원, 충남대 사회학과 4만3천원, 최금자 2만원, 이은준 1만원, 김경민 5만원, 김태희 1만원, 전기호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원장 10만원, 조자경 1만원, 김종명 5만원, 강대경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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