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침략전쟁에 이땅의 젊은이들을 몰아넣은 바로 그 사람을 기념한다니…
베트남전쟁. 일단 그 전쟁이 미국의 침략전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전쟁의 성격이 미국이 착각하듯이 자유의 성전이 아니라 베트남 민족해방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나라 밖에선) 역사적 정설로 굳어졌다. 철없는 미국식 ‘자유’의 독단으로 그 땅에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없이 죽어가야 했던가. 지금 베트남에는 아직도 그 전쟁으로 불구가 된 삶들의 신음이 들리고, 고엽제 때문에 기형의 삶을 살아야 하는 어린이들이 그 미친 미국식 ‘자유’의 대가를 몸으로 치르고 있다. 공산주의나 파시즘의 죄악이 있다면, 또한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죄악이 있고, 그 죄악의 규모 역시 가공할 수준이었다.
제정신을 가진 정치가였나
그 죄악의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 베트남 민중의 편에서 보면 가해자이면서,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보면 피해자라는 묘한 이중규정을 받으며. 그런데 최근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박정희의 자청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제정신을 가진 정치가라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도 슬슬 기피하는 그 전쟁에 제 나라의 젊은이의 목숨을 갖다바치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그 결정은 내려졌고, 그 결과 우리 젊은이들은 ‘미국의 용병’이라는 모욕을 듣다가, ‘양민의 학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아 돌아와서는 ‘고엽제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미국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자진해서 한 일이라고 한다. 과연 그는 자기 아들을 거기에 보낼 생각은 있었던 걸까?
아, 나도 안다. 이런 유의 도덕적 논증이 우리 사회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수천이라는 젊은 목숨의 수도 그저 한마디 “베트남전쟁 덕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막강한 논증을 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내 모르는 게 아니다. 이렇게 얘기해 봤자 “배가 불러서 그런다”는 비아냥이나 들을 뿐이라는 것을. 나라고 모를 리 있겠는가. 이런 논리를 깨려면 도덕적 논증이 아니라 “파병을 않고도 우리보다 그 전쟁에서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은 나라들이 있다”는 명쾌한 경제학적 논증을 들이대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또한 안다. 이것이 얼마나 징그럽고 잔인한지를. 이것이 바로 박정희가 우리 몸 속에 새겨놓은 파시스트 습속이라는 것을. 이 징그러운 습속이 몸 밖으로 빠져 나와 수백억의 물질 속에 들어가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 그것이 바로 국고보조로 지어지는 박정희 신전이라는 것을. 듣자 하니 이 징그러운 흉물을 2002년 월드컵을 맞아 전세계인들에게 자랑할 예정이라고 한다. 듣자 하니 그 신전으로 ‘한국의 경제를 일으킨 박정희의 공’을 기릴 예정이라 한다. 월드컵을 보러 올 관중의 대부분은 돈 많은 선진국의 사람들일 텐데, 그들 앞에서 뭘 자랑하겠다는 걸까? 생각을 해보라. “세계가 놀랄 경제발전” 어쩌고 하며 자랑을 늘어놓는데, 정작 그 세계인들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 우리는 놀란 적 없는데….” 또 우리가 관광객이 되어 가령 칠레를 방문하여 거기서 제 나라 사람 수천을 희생시키고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피노체트의 업적을 기리는 신전을 본다면, 우리는 뭐라 그럴까? 피노체트가 있기에 칠레는 위대하다? 대단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관광자원?
경제위기가 있으면 ‘원인’을 찾아 고치는 대신 ‘범인’을 찾아 성토하려 들고, 경제발전이 있으면 그 ‘원인’을 찾는 대신 ‘은인’을 찾아 감사부터 하려는 버릇.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묘사한 이 원시적 풍습이 21세기를 맞도록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곳. 박정희 신전은 대단히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갖는 고고학적, 민속학적, 인류학적 자료이자 동시에 세계적인 관광자원이 아닐 수 없다. 웰컴 투 코리아, 비지트 코리아, 자랑스런 나의 조국. 어서 오세요. 한국방문의 해예요. 난 이럴 때 구경당하는 한국인이 아니라 구경하는 세계인이 되고 싶다.
"의료기자재·의약품 50억원 지원"
고엽제 환자 나 선생의 신상명세서


(사진/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한 월남참전 전사자의 무덤. 5천명의 무고한 젊은이들이 박정희의 야욕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아, 나도 안다. 이런 유의 도덕적 논증이 우리 사회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수천이라는 젊은 목숨의 수도 그저 한마디 “베트남전쟁 덕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막강한 논증을 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내 모르는 게 아니다. 이렇게 얘기해 봤자 “배가 불러서 그런다”는 비아냥이나 들을 뿐이라는 것을. 나라고 모를 리 있겠는가. 이런 논리를 깨려면 도덕적 논증이 아니라 “파병을 않고도 우리보다 그 전쟁에서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은 나라들이 있다”는 명쾌한 경제학적 논증을 들이대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또한 안다. 이것이 얼마나 징그럽고 잔인한지를. 이것이 바로 박정희가 우리 몸 속에 새겨놓은 파시스트 습속이라는 것을. 이 징그러운 습속이 몸 밖으로 빠져 나와 수백억의 물질 속에 들어가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 그것이 바로 국고보조로 지어지는 박정희 신전이라는 것을. 듣자 하니 이 징그러운 흉물을 2002년 월드컵을 맞아 전세계인들에게 자랑할 예정이라고 한다. 듣자 하니 그 신전으로 ‘한국의 경제를 일으킨 박정희의 공’을 기릴 예정이라 한다. 월드컵을 보러 올 관중의 대부분은 돈 많은 선진국의 사람들일 텐데, 그들 앞에서 뭘 자랑하겠다는 걸까? 생각을 해보라. “세계가 놀랄 경제발전” 어쩌고 하며 자랑을 늘어놓는데, 정작 그 세계인들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 우리는 놀란 적 없는데….” 또 우리가 관광객이 되어 가령 칠레를 방문하여 거기서 제 나라 사람 수천을 희생시키고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피노체트의 업적을 기리는 신전을 본다면, 우리는 뭐라 그럴까? 피노체트가 있기에 칠레는 위대하다? 대단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관광자원?

진중권/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