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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지들이 반발해봤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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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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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자료 유출 둘러싸고 내홍 겪는 한나라당… 비주류 강력 항의에 주류쪽은 당혹해하면서도 느긋

최병렬 대표의 ‘과욕’인가, 물갈이 대상의 ‘몸부림’인가.
17대 총선 공천심사 기초자료 유출 사건을 계기로 한나라당 내 주류-비주류간 명분싸움이 점입가경이다. 118명의 당 소속 현역의원들을 A(공천 확실), B(공천 유력), C(경선 실시), D(경선 대상이나 탈락 가능성 높음), E(탈락 확실)의 5등급으로 분류한 공천심사 기초자료가 언론에 유출된 뒤, 한나라당은 피아를 구별하기 어려운 난타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C~E 등급을 맞아 공천이 위태로워진 75명(65%) 의원들의 저항은 “이들이 한솥밥을 먹는 동료들인가”라는 의문마저 들게 할 정도다.

1월5일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에서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최병렬 대표. 현재 서청원 전 대표가 중심이 된 비주류와 정치 생명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사례 하나. 최 대표는 파문 진화를 위해 지난해 마지막 날 긴급 상임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는 예정에 없이 급히 의원들을 불러모은 게 미안했던지 “상임운영위 때문에 점심 약속이 무효화된 분들께 점심을 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온 D급 ㄱ의원의 볼멘소리. “D급이 무슨 점심을 먹나.”

D급이 무슨 점심을 먹나?


공천이 보장된 A, B 등급 의원들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최 대표는 평소 ‘올린 머리’에 투피스 정장 차림을 고집하는 박근혜 의원이 이날 상임운영위에 단발머리에 바지 차림으로 나타나자 “헤어 스타일이 확 바뀌었네요”라며 관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최 대표에게 돌아온 것은 박 의원의 ‘면박’뿐이었다. “지금이 헤어 스타일 이야기할 때입니까.”

한나라당의 이런 갈등은 1월5일 운영위원회에서 진정 국면으로 돌아서는 계기를 맞았다. 비주류의 총공세가 예상됐던 이 회의에선 ‘화합론’이 대세를 이루며 공천심사위 재구성, 국회의원-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 등 비주류의 핵심 요구가 한풀 꺾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내분은 활화산이 사화산으로 변했다기보다는, 휴화산으로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갈등의 직접 원인인 최 대표의 독주 체제 지향성과 비주류의 제몫 챙기기가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승홍 의원이 파동 경위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이른바 ‘분권형 대표’라는 한계 속에서 당을 이끌어온 최 대표는 꾸준히 당 장악력 확대를 꿈꿔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말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법의 수용을 요구하며 열흘 동안 단식투쟁을 벌인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당 안팎에선 최 대표가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공천심사위를 꾸린 뒤 대규모 물갈이를 통해 이런 구상에 ‘화룡점정’을 찍으려 한다고 본다.

실제 최 대표는 공천자료 작성 및 유출의 책임론이 제기되자 당 운영의 ‘오른팔’ 격인 이재오 사무총장을 자르는 선에서 마지노선을 치고 정면돌파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최 대표쪽은 비주류 진영의 반발을 ‘물갈이 대상의 마지막 저항’으로 규정한 상태다. 강성으로 분류되는 최 대표의 한 측근은 “C, D 등급 의원들의 면면을 보면 대체로 당 안팎이 공감하는 퇴출 대상이 많다”며 “개혁의 시대적 요구 속에 비주류의 반발은 결국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호, 개혁으로 달리는 걸까

최 대표의 다른 측근도 “2000년 16대 총선 때 공천에서 탈락한 김윤환·이기택·신상우 전 의원 등이 민국당을 결성했지만 모두 고배를 마셨다”며 “비주류가 기껏 반발해봐야 민국당 수준을 넘겠느냐”고 말했다. 최 대표쪽은 아울러 김덕룡·강재섭 의원 등의 중진들과, 개혁 성향의 당내 초·재선 그룹을 껴안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 의원의 경우 지난 1월1일 세배객들을 맞는 자리에서 “공천자료 유출 사건은 우연적인 일이며, (개혁이라는) 큰 흐름이 있지 않느냐”고 밝혀, 사실상 최 대표에 동조했다.

당내 공천 등급 문서 파동 속에서 열린 한나라당 운영위원회.
그러나 비주류 진영은 최 대표의 움직임을 ‘사당화’ 기도로, 자신들의 반발을 ‘당내 민주화 과정’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태도다. 비주류쪽은 이회창으로 대표되는 ‘제왕적 총재’ 시대가 끝난 마당에 분권형 체제 속의 최 대표가 당을 장악하려는 것은 시대 퇴행적 흐름이라고 몰아붙인다.

이런 맥락에서 비주류쪽은 최 대표의 개혁공천 주장을 “허울뿐인 명분”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서 전 대표의 측근은 “최 대표가 ‘영남 50% 물갈이’ ‘현역 30% 탈락’ 등을 흘리며 개혁성을 내세우지만, 어떤 사람들로 바꾸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며 “한나라당이라는 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당내 소장파 모임인 미래연대의 관계자는 “최 대표가 5공의 대표적 인권탄압 인사로 꼽히는 의원에 대해서조차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식의 태도를 보일 때, 개혁공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비주류 역시 “지역구도와 냉전논리, 특권의식으로 가득 찬 한나라당의 몸통”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에 놓여 있는 상태다. 공천심사 자료가 유출된 직후 폭발 양상을 띠었던 비주류의 반발이 진정 양상으로 돌아선 것도 여론의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비주류의 반발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든, 최 대표의 강공 전략이 벽에 부닥치든 한나라당은 당분간 치유하기 힘든 내상에 시달릴 전망이다.

글 정재권 기자/ 한겨레 정치부 jjk@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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