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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최고로 무기력한 최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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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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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지도부 개편론에 대한 미온적 태도 등 정치력 부재를 질타하는 목소리들

(사진/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의약분업 문제를 공식논의한 민주당 최고위원회 워크숍. 일부 최고위원들은 의약분업 시행 연기론을 들고나와 비난을 받았다)
“최고위원들이 당보다는 차기행보와 겨냥한 지방 강연 등 개인 이미지 관리에만 신경쓰는 것 아니냐.”(민주당 당직자)

민주당 최고위원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당내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대의원들의 민심을 등에 업고 선출된 직선 최고위원들이 당 중심으로서 제구실을 못한다는 것이다. 수도권의 한 초선의원은 “최고위원들이 전당대회 경선에 나서면서 내세웠던 공약들을 상기해보라. 강한 여당을 만들겠다, 정책정당을 만들겠다는 등 구호는 거창했지만 지금 돼가는 게 있느냐”고 말했다. 또다른 초선의원은 “전당대회 이후 국회의 장기파행, 의료계 파업 등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이들 현안을 해결해가는 데 최고위원들이 당 지도부로서 정치력을 발휘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8월30일 전당대회를 통해 출범한 최고위원에 대한 기대가 겨우 두달이 지나가는 동안 실망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사실 최고위원회의 이런 위상추락에는 몇 가지 정치적 고비 길에서 최고위원회가 보여준 정치력 부재가 한몫 했다.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대표적인 것은 전당대회를 전후해서 비등해진 당 3역 등 지도부개편론에 대한 최고위원들의 미온적 태도이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7월24일 국회법 개정안의 날치기 처리에 한나라당이 반발하면서 이후 국회가 장기파행을 겪게 되자 당 3역 등 당시 지도부에 대한 책임론이 팽배했다. 실제 일부 최고위원들은 개인적인 자리에서 “당직개편이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공식 최고위원회에서는 이 문제가 안건으로 상정되지도 않았다. 당직개편을 고려하지 않은 당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제구실을 포기했다는 비판이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9월15일 보다 못한 초·재선의원들이 조찬모임을 갖고 당 지도부의 정국파행 책임을 거론하며 지도부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서는 등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당내 언로가 막혔다. 최고위원회가 당내 여론수렴 및 조정이라는 최소한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으면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의약분업과 의료계 파업을 둘러싼 대응은 오히려 정책혼선만 불러왔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최고위원회는 9월18일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최선정 복지부 장관을 불러 워크숍을 한 이후 여러 차례 공식 논의하는 등 이 문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내보였다. 당시 이 문제로 온 나라가 들끓었던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부 최고위원들이 임의분업과 의약분업 시행 연기를 들고나와 집권당이 의약분업 원칙에서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같은 달 22일 임채정, 신기남 등 개혁파 의원들의 모임인 ‘푸른정치모임’은 의약분업 원칙 관철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조직적으로 반발하기도 했다. 당 관계자는 “당시 몇몇 최고위원들이 ‘국민불편 해소’라는 명분을 내세워 의약분업 연기와 완화 등을 주장하자 이해찬 정책위의장이 ‘의약분업 원칙이 훼손된다면 정책위의장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국회가 장기파행을 거듭할 때 최고위원회가 보여준 무기력은 최고위원회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국회가 장기파행을 거듭하자 최고위원들은 원내 대책을 직접 챙기기로 하고 정대철·박상천·김근태 최고위원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한나라당에 제의했던 여야 중진회담은 한나라당의 거절로 한 차례 회담도 갖지 못한 채 없던 일이 돼버렸고, 원내 대책도 두 당 총무라인이 가동되면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흐지부지됐다.

의결기구인가 협의기구인가

(사진/최고위원 9명을 선출한 지난 8월30일의 민주당 전당대회. “선거 때의 공약들은 거창했지만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당내 비판이 팽배하다)
이처럼 최고위원회가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최고위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당무에 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당직자는 “최고위원들이 당의 일을 자기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하다못해 전당대회를 제외하곤 사실상 당최고의결기구인 당무위원회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 최고위원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또다른 당직자는 “10월 초 사무총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당조직개편안이 ‘위인설관식 조직개편’이라는 당내 반발에 부딪혔을 때 최고위원들이 보여준 모습은 정말 무책임했다. 당시 조직개편안은 최고위원회에 보고된 뒤 당무위원회에 상정된 것이다. 더욱이 최고위원회에서 일부 최고위원들은 당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사무총장의 권한을 원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그러나 막상 조직개편안이 논란을 빚자 최고위원 가운데 누가 책임감을 갖고 당조직개편안의 취지를 설명하기라도 했느냐”고 말했다. 당시 민주당은 조직개편안 파문으로 정동채 기조실장이 사의를 표명하는 등 내홍에 시달렸다.

당헌당규상의 모호한 위상 등도 최고위원회의 역할설정을 어렵게 한다. 민주당 당헌은 최고위원회의 기능과 관련해 ‘총재를 보좌하여 정책적 주요 당무에 관하여 총재의 협의에 응하고, 일반적 당무 집행을 지도·감독하며 당무위원회에서 위임한 안건을 처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고위원회를 기본적으로 의결기구가 아닌 협의기구로 규정한 것이다. 직선 최고위원에 대한 당 안팎의 기대와 현실적 규정 사이의 괴리가 최고위원들의 발목을 옥죌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지난 10월11일 단행된 중간당직자 인사는 김옥두 총장-서영훈 대표-김대중 총재로 이어지는 결재라인을 거쳐 발표됐다. 이른바 당의 중심이라는 최고위원회는 공식라인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이었다. 또 준비가 부족한 회의운영 등 실무적인 잘못도 지적된다. 최고위원회쪽 관계자는 “최고위원회에 앞서 회의 안건자료 한번 당사무처로부터 받아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안건 정도만 통보받는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충실한 회의가 가능하겠느냐”고 말했다.

최고위원들은 이런 지적에 대해 당내 위치에 따라 반응과 처방이 달랐다. 동교동계 출신의 경우 최고위원회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다는 반응이 주류였다. 한화갑 최고위원은 “당무의 집행부는 사무총장 등 당 4역이다. 최고위원은 당론을 모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결정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최고위원회 활성화 방안으로 최고위원들의 당 3역 전진배치나 분야별 역할분담 등이 거론됐지만, 최고위원들이 상호협력관계이면서 경쟁관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근태·정동영 의원의 ‘동감’

권노갑 최고위원은 “최고위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권 최고위원은 “당헌에 규정된 대로 최고위원회가 운영되는 것이다. 일부 정책상의 혼선도 일부 최고위원들이 확정되지 않은 안을 밖에 말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중권 최고위원도 “잘하고 있는 것 아니냐. 현안들이 광범위하게 잘 논의되며, 대통령의 자문에도 잘 응하고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최고위원 나올 때 동-서, 당-정부의 다리론을 설파했듯이 그 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동조했다.

그러나 최고위원회가 위축돼 있다는 지적에 동의하는 최고위원도 적지 않았다. 특히 개혁파로 분류되는 김근태·정동영 최고위원 등은 나름대로 해법 마련에 고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김 최고위원은 “현재의 당헌당규로는 최고위원회의 정치력을 살리기 위한 방안이 별로 없다. 우선 권한이 없다. 특히 총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국내 정치풍토에서는 누가 총재를 자주 만나느냐가 중요한 실정이다. 그런데 최고위원은 한달에 한번씩 만나는 데 비해 당 3역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현안도 보고하고 총재의 지시도 받는다. 어느 쪽에 힘이 실리겠는가”라고 말했다.

정동영 최고위원도 “지금까지는 불만족스러웠다. 시험운영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달 1일부터 다른 당직자들의 배석이 배제된 최고위원들만의 모임을 시작한 것은 최고위원회의 논의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이다. 정치중심에 서기 위한 일들을 찾아갈 것이다”고 말했다. 또 정대철 최고위원은 “실제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정국현안의 해법에 뾰족한 수가 없는 것 아니냐. 당 자체가 역할을 잘 못하고 있다”고 말했고, 박상천 최고위원은 “내가 경선에 참여하면서 ‘강한 여당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사실 지금 최고위원회의 권한으로는 공약을 이행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글 박병수 기자suh@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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