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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의장 뽑는데 관중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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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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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전당대회 흥행몰이 실패 예감… 정동영 독주 속에 군소 후보들 합종연횡 가능성

열린우리당에 빨간 불이 켜졌다. 4·15 총선을 앞두고 도약대로 삼고자 했던 1·11 전당대회가 정치권 안팎의 관심을 끌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당의 얼굴을 뽑는 의장 경선에 김근태 원내대표가 출마하지 않음에 따라 정동영 의원의 독주가 예상되는 싱거운 게임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예비선거에서 김두관 · 김원웅 낙마

분당 뒤 내부 갈등을 겪었던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조순형·추미애 의원의 경쟁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이후 민주당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과 비교하면 열린우리당이 맞고 있는 위기는 더욱 분명해진다.


열린우리당이 좀처럼 일어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12월29일 예비선거에서 3명의 의장경선 후보들이 뽑혔다.(사진/ 연합)
12월29일 중앙위원을 상대로 실시한 예비선거 결과는, 적어도 흥행 면에서는 감표 요인으로 작용할 것 같다. 애초 김근태 대표가 빠진 상태에서 경선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였던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과 김원웅 의원이 1차 관문에서 낙마했기 때문이다. 중앙위원 173명 중 161명이 1인3표씩을 행사한 이날 예비선거에서 유재건·김정길·장영달·이미경·신기남·정동영·이부영·허운나(이상 기호순) 후보가 1월11일 본선에 나설 의장경선 후보로 뽑혔다. 8명의 후보 모두 전·현직 의원들로 채워진 것이다. 당 관계자는 “중앙위원의 절반 이상이 전·현직 의원들이다보니 김두관 전 장관의 낙마와 유재건 의원의 선전이라는 이변이 나타나지 않았겠느냐”며 “중앙위원들과 일반 대의원들의 표심에 괴리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본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날 예선의 득표율과 순위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정 희구’ 성향의 예선 결과는 ‘정동영 독주’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12월28일 김근태 대표가 ‘당 의장 경선에 대한 입장’이란 글을 통해 원내대표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강조하면서 불출마 의사를 밝혔음에도 그를 지지하는 이호웅 의원 등이 대리등록을 시도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열린우리당의 중진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동영 의장 체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이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정 의원은 현재의 열린우리당 위기가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분석하고 개혁 지도부 구성이라는 ‘개혁의장론’을 펴고 있지만, 의원들 상당수는 안정감과 경륜을 갖춘 ‘중진의장론’에 기울어 있는 상태다. 따라서 본선을 통과한 의원들 가운데 김대중 정부에서 행자부 장관을 지낸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출신의 김정길 전 의원이나 통합연대 출신인 이부영 의원쪽에 무게를 실어줄 가능성이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 열린우리당의 의장 경선을 1강2중 구도로 전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11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될 새 지도부가 지향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열린우리당의 총선 승리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회의원이나 지구당위원장들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 치러지는 이번 의장 경선에서 대의원들의 표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최대의 카드는 ‘총선 승리 전략’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정동영 후보가 내세우는 것은 ‘간판론’이다. 정동영만한 간판이 있느냐는 것이다. 2002년 대선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고, 개혁세력으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는 정 후보가 반 한나라당 전선의 선봉장으로 나서야 총선 승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정 후보쪽은 “정 의원이 간판으로 나선 뒤 상향식 공천을 통해 참신하고 전문성을 갖춘 정치신인들을 발굴해 포진시키면 총선 승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의장경선은 초반 1강2중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사진 맨 왼쪽부터 정동영(이용호기자), 김정길(한겨레21), 이부영(한겨레 강창광) 후보.

정동영의 간판론 vs 김정길의 동남풍론

정 후보쪽은 의장 당선 여부보다는 흥행 여부를 더 우려하고 있는 분위기다. 당 의장으로 가는 길은 좀더 순탄해졌을지 몰라도 ‘큰손’들이 빠진 상태에서 ‘빛바랜 승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후보의 한 측근은 “압도적인 지지를 통해 확고한 리더십을 구축하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느냐”고 전제한 뒤, “그러나 의장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분위기 속에 되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당내에서는 정 의원이 개혁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당의 운영을 맡기기에는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정 의원이 ‘문제제기 집단의 수장’으로서 뛰어날지는 몰라도, 이질적인 여러 세력의 융합으로 인해 불안정한 당을 안정적인 궤도에 안착시킬 수 있는 리더십을 갖추고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김정길 후보쪽은 ‘동남풍론’을 펼치고 있다. 어차피 총선에서 승리를 하려면 영남 지역 의석(65석)을 독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 의석을 빼앗아와야 하는데, 영남 출신인 김 후보가 의장이 돼야 유리한 지형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 진영이 폈던 ‘영남후보론’의 재판이다. 김혁규 경남지사의 한나라당 탈당과 지사직 사퇴로 흔들리기 시작한 부산·경남 민심을 열린우리당쪽으로 돌리고, 열린우리당 간판으로의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경쟁력 있는 후보를 영입하는 데는 김 의장 체제가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김 후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해 일했고 당 지도부의 상당수가 호남 출신으로 채워질 것인 만큼, 호남 민심이 빠져나갈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라는 것이 김 후보쪽의 설명이다.

또 김 후보쪽은 정 후보쪽를 의식한 듯 검증된 리더십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민주당에서 선출직 최고위원와 원내총무를 지냈고, 국민의 정부에서 행자부 장관과 정무수석을 지내 국회와 행정부, 청와대에서 두루 국정에 참여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의장의 중요한 조건으로 안정감을 꼽는 대의원들의 심리를 파고들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그러나 김 후보는 지난 2000년 총선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에서 낙선한 이후 3년 이상 정치적 공백이 있었던 점,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의 활동이 대의원들에게 각인돼 있지 않다는 약점이 있다. 안정감이라는 장점은 새로운 리더십을 바라는 대의원들에게는 원로 정치인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부영 후보쪽이 내세우는 것은 ‘무지개론’과 ‘+알파론’이다. 과거와 달리 당 의장 한명의 확고한 리더십으로 당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후보들이 갖지 못한 강점을 가진 이 후보가 지도부로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후보쪽은 “열린우리당의 지지 기반은 호남과 젊은 표인데, 호남표는 갈라져 있고 젊은 표 역시 결집돼 있지 않다”며 “이 의원은 한나라당을 이탈한 지지세력과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열린우리당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세력들을 끌어올 수 있는 강점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의 열린우리당 지지세력만으로는 총선 승리가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 ‘+알파’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이 후보가 의장으로서 제격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의장보다는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 소극적인 전략으로 읽힌다. 다른 후보들에 비해 고정표에서 열세인 이 후보쪽은, 대의원들의 ‘전략적 투표 성향’에 희망을 걸고 있다.

전략적 투표로 어부지리 가능할까

이 밖에 ‘선명한 개혁’을 앞세운 신기남 후보와, ‘통합과 개혁의 리더십’을 강조한 장영달 후보, ‘경륜과 전문성’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유재건 후보가 나머지 1장의 카드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1인2표 방식으로 치러지는 본선에서 신 후보는 ‘개혁 색채’에서, 장 후보는 지역(전북 전주) 면에서 각각 정 후보와 지지층이 겹치는 단점이 있다. 유 후보는 친화력을 바탕으로한 당내 경쟁력은 높지만 다른 후보에 비해 전국적인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여성 몫으로 자동으로 본선 진출을 보장받은 이미경·허운나 후보가 본선에서 자력으로 5위에 들지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5위 바깥으로 밀릴 경우엔 5위 대신 여성 다득표자가 지도부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후보들 사이에 어떻게 합종연횡이 이뤄지느냐에 따라, 예상과는 다른 판이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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