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신진보 · 보수론… 합리적 실용주의 노선, ‘몰이념’이라는 지적도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변했다” “그렇지 않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통령 선거 때의 정책기조와 집권 뒤의 그것에 적지 않은 차이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대미 외교, 노사 문제, 2만달러 시대론 따위가 종종 논쟁을 지폈다.
이런 가운데 노 대통령이 12월5일 대전을 방문한 자리에서 “제3의 길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합리적 실용주의로 간다”고 선언했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이를 “21세기 신진보·보수론”이라고 명명했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이념적 좌표 문제를 새롭게 정리해 체계적으로 설파하기 시작한 셈이다.
제3의 길 향한 정책구도 정치로
이날 대전·충남도민과의 오찬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우선 “지금까지 (나한테) ‘당신은 보수요, 진보요’라고 질문했다. 또한 요즘도 지역구도를 이념구도로 재편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많다. 옳다. 그러나 어제까지 옳았지만 앞으로 시대에는 그것도 맞지 않는다. 지역구도 시대는 정말 극복해야 하지만 진보, 보수도 이미 과거의 것으로 넘어간다”고 말했다. “지역구도를 이념구도로 재편해야”는 1년여 전 그의 핵심 대선전략이었다. 그는 2002년 5월14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 머리발언에서 “지역구도의 정쟁을 정책구도 정치로 바꿔내겠다. 지역분열 때문에 흩어진 개혁세력을 하나로 모으겠다. 높은 곳에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 가까이에 있는 겸손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함으로써 1987년 대선 때 분열된 김대중-김영삼씨를 묶는다는 ‘민주세력 대연합’을 시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인 박종웅 의원(한나라당)을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내달라는 노 후보의 요청을 거절함에 따라 연합 구상은 벽에 부닥쳤지만…. 노 후보는 대선 공약도 정책적 차별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맞서 ‘수구 대 개혁세력’의 대결구도로 만들려는 전략적 고려도 작용한 탓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중산층과 서민이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대선공약집)며 사회적 약자 대변 의지를 물씬 풍기는, 진보적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그러던 그가 오늘에 이르러 “어제까지 옳았지만 앞으로의 시대에는 그것도 안 맞다. 지역구도 시대는 정말 극복해야 하지만 진보, 보수도 이미 과거의 것으로 넘어간다”고 ‘좌표 수정’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 대통령은 대전·충남 간담회에서 합리적 실용주의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OECD의 21세기 지도력 보고서엔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피라미드에서 네트워크 사회로 변화한다”며 “폐쇄적 권위적 지도력은 쇠퇴하고 개방적 수평적 지도력으로 가며, 명령이 아닌 자율과 창의로 움직이는 사회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그 시대를 대표하고 이끌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정권을 잡는다”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같은 새로운 흐름을 모색하는 사람과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처럼 이념이 아니고 자율과 분권, 대화와 타협을 추진하는 게 진보이고 옛날 식으로 패권, 보수주의, 밀실에서 의사결정하고 이런 시대에 미련을 갖고 자꾸 매달리는 사람들이 보수 수구 아닌가”라고도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신행정수도 건설을 비롯한 지방분권 문제를 이 개념에 적용했다. 그러나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지방분권 외에 다른 분야의 정책에서도 대통령이 설명한 이론은 이미 구체화되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노 대통령이 주도해온 일련의 탈권위 행보가 바로 ‘피라미드에서 네트워크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선도적 행동’이 될 수 있다. 또한 노 대통령이 민주노총 지도부나 전북 부안의 방사성 폐기장 반대 시위 등을 거듭 비판한 것도, 상대방이 합리적 실용주의를 따르지 않고 과거의 도식에 사로잡혀 ‘구 진보’에 머물고 있기 때문으로 보는 것같다.
“좌우의 잣대로 21세기 재단 어렵다”
‘진보도 보수도 아닌 합리적 실용주의가 제3의 길’이라는 노 대통령의 ‘신상품’은 영국의 석학 앤서니 기든스 교수가 주창한 ‘제3의 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기든스는 전통적 의미의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는 노선을 제안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집권이념으로 채택되도록 한 바 있다. 그는 올해 6월 한국을 방문해서는 “노동시장이 유연하면서도 실업률이 낮은 사회가 선진사회이고 이를 위한 전략이 제3의 길”이라며 “지식 경제체제가 도래함에 따라 노동자 계층이 급격히 약화되고 각 국가는 세계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참모들도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노 대통령의 변신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한 참모는 “김대중 대통령도 이념 대립의 시대는 갔다는 점을 누누이 말한 바 있다”며 “노 대통령도 후보 시절과 달리 국정운영 책임자로서 실용주의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도 사실은 지금과 같은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노선을 선호했다”며 “다만 당시에는 선거전략상 대중적으로 좀더 쉽게 어필할 다른 접근방법에 무게를 뒀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든스의 ‘제3의 길’이 유럽 지식사회에서 “변형된 신보수주의 아니냐”는 비판에 부닥쳤던 것처럼, 노 대통령의 신상품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일부 있는 것 같다. 노무현 경선캠프의 정책팀장으로 활동했던 윤석규 안산열린사회정책연구소 소장은 “보수세력들이 종종 ‘이데올로기 대립’ 등의 부정적 담론화를 시도하는 바람에 이념이란 말의 뜻이 애매해지긴 했으나 이념은 곧 정책”이라며 “진보·보수 등의 정책구분을 배제한다면 국민들은 무엇을 보고 국정운영을 판단하라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노 대통령과 함께 가고 있는 열린우리당을 두고도 “이라크 파병 문제를 두고도 당론을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있다”며 몰이념, 몰정책에 따른 지리멸렬상을 경계했다.
어쨌든 노 대통령이 지방분권 문제를 ‘21세기 신진보·보수론’의 첫 적용 대상으로 삼은 점도 흥미롭다.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노사 문제에서 보수로 선회하는 대신에, 영국의 소외·낙후 지역인 스코틀랜드 문제를 지방분권으로 푸는 데 주력했던 것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당은 보수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코틀랜드에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디볼루션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즉, 노 대통령도 사회적 약자 끌어올리기를 통한 사회통합 목표를 여전히 유지하되, 계층보다는 지역 문제에 좀더 관심이 깊은 듯하다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 빼닮아… 지방을 내세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대전·충남 간담회를 통해 “시대가 바뀌면 융성하는 지역도 이동한다. 그렇게 보면 앞으로 수십년간은 충청도가 각광받는 시대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수도권은 너무 과밀하고 집중되어 고통이며, 지방은 소외되어 고통이다.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해결하지 않고는 국민화합이나 2만달러 시대가 불가능하다. 참여정부는 지방을 발전시켜서 해결할 것이다. 지방이 독자적 경쟁력을 갖추고 국가발전의 역동적 주체가 되게 하겠다”고 말했다.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사진/ “지방이 독자적 경쟁력을 갖추고 국가발전의 역동적 주체가 되게 하겠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2월5일 대전에서 대전 · 충남도민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연합)
이날 대전·충남도민과의 오찬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우선 “지금까지 (나한테) ‘당신은 보수요, 진보요’라고 질문했다. 또한 요즘도 지역구도를 이념구도로 재편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많다. 옳다. 그러나 어제까지 옳았지만 앞으로 시대에는 그것도 맞지 않는다. 지역구도 시대는 정말 극복해야 하지만 진보, 보수도 이미 과거의 것으로 넘어간다”고 말했다. “지역구도를 이념구도로 재편해야”는 1년여 전 그의 핵심 대선전략이었다. 그는 2002년 5월14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 머리발언에서 “지역구도의 정쟁을 정책구도 정치로 바꿔내겠다. 지역분열 때문에 흩어진 개혁세력을 하나로 모으겠다. 높은 곳에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 가까이에 있는 겸손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함으로써 1987년 대선 때 분열된 김대중-김영삼씨를 묶는다는 ‘민주세력 대연합’을 시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인 박종웅 의원(한나라당)을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내달라는 노 후보의 요청을 거절함에 따라 연합 구상은 벽에 부닥쳤지만…. 노 후보는 대선 공약도 정책적 차별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맞서 ‘수구 대 개혁세력’의 대결구도로 만들려는 전략적 고려도 작용한 탓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중산층과 서민이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대선공약집)며 사회적 약자 대변 의지를 물씬 풍기는, 진보적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그러던 그가 오늘에 이르러 “어제까지 옳았지만 앞으로의 시대에는 그것도 안 맞다. 지역구도 시대는 정말 극복해야 하지만 진보, 보수도 이미 과거의 것으로 넘어간다”고 ‘좌표 수정’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 대통령은 대전·충남 간담회에서 합리적 실용주의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OECD의 21세기 지도력 보고서엔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피라미드에서 네트워크 사회로 변화한다”며 “폐쇄적 권위적 지도력은 쇠퇴하고 개방적 수평적 지도력으로 가며, 명령이 아닌 자율과 창의로 움직이는 사회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그 시대를 대표하고 이끌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정권을 잡는다”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같은 새로운 흐름을 모색하는 사람과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처럼 이념이 아니고 자율과 분권, 대화와 타협을 추진하는 게 진보이고 옛날 식으로 패권, 보수주의, 밀실에서 의사결정하고 이런 시대에 미련을 갖고 자꾸 매달리는 사람들이 보수 수구 아닌가”라고도 말했다.

사진/ 노무현 대통령은 정책구도 재편을 핵심 대선 전략으로 내세웠다. 지난해 5월14일 당시 노무현 후보가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연합)

사진/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노총의 투쟁 방식을 ‘구 진보’로 간주하는 것 같다. 노동자들이 주5일 근무제 실시 정부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류우종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