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중진들 입맛 돋구는 총선용 카드… 개헌론 계기로 당 분화 가능성까지 점쳐져
대선자금 정국이 본격화한 이후, 검찰의 칼끝에 끌려다니던 한나라당이 새 카드를 내놓았다.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이다. 한 일간지가 최병렬 대표를 포함해 서청원 전 대표, 강재섭·김덕룡 의원 등 한나라당 중진 4명이 11월12일 만나 “내년 4월 총선 전에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보도하면서, 한때 개헌론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며칠 만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한나라당 중진들의 개헌론은 단지 여론을 살펴보기 위한 ‘애드벌룬’이었을까, 아니면 속내를 너무 일찍 드러내버린 것일까. 여의도 정가에서는 개헌론을 계기로 한나라당의 분화 가능성까지 점치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대통령이 외교·국방 등 외치 분야를, 국회 다수당 혹은 다수당 연합이 내치 분야를 맡는 권력분점 구조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할 경우, 차기 주자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지난 두번의 대선 결과가 재연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3야 공조’경험에 자신감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는 보장하되, 그 권력을 나눠갖는 구조에 당연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명분이다. 명분이 서고 여건만 갖춰진다면 “따먹고 싶은 사과”인 셈이다. 그동안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은 먼저 드러내놓고 주장하기 힘든 주제였다. 대선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국회 다수 의석을 배경삼아 대통령의 권한을 반토막으로 줄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지극히 정략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최 대표는 11월13일 <한국방송> 텔레비전 토론에서 “지금 그 얘기(개헌)를 잘못 내놓으면 정략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므로 필요하면 내년 총선 후 얘기하거나 현재의 (대선자금·특검) 정국을 정리하고 생각해볼 수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제동을 걸었다. 중진모임 이전부터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의 불을 지펴왔던 홍사덕 원내총무도 다음날 기자간담회에서 “최 대표가 국민을 상대로 선언한 마당에 재론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며 개헌론 함구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면 서청원 전 대표를 비롯한 중진들은 왜 이 시점에 그런 민감한 주제를 던졌을까.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까지는 한나라당이 당했지만, 본격적인 특검 정국에 접어들면 노 대통령이 당할 일만 남아 있다. 측근 비리의 실체가 드러나면 재신임 정국 이전인 10%대 지지율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노무현 정권의 4년을 그대로 수용할 것이냐는 국민적 여론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특검법을 통과시키면서 공조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이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총선 공약으로 내걸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의 설명은 개헌 카드가 단기적으로는 국면전환용·정국돌파용 성격이 짙지만, 장기적으로는 총선용이라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단 검찰에 쏠려 있는 눈을 정치권으로 분산시키면서, 특검을 거치는 동안 분권형 개헌 논의를 끌어낼 명분이 마련될 경우에 대비하는 다목적 포석이라는 얘기다.
권력구조의 개편이라는 개헌 논의가 쉽사리 터져나올 수 있게 된 데는, 11월10일의 ‘3야 공조’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노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특검안이, 개헌 가결 의석인 재적의원 3분의 2(182석)를 넘어선 184표의 찬성으로 통과된 것이다. 박상천 대표와 정균환 원내총무 등 민주당의 현 지도부가 ‘분권형 대통령주의자’이고, 자민련 역시 내각제 개헌에 적극적인 만큼 정치권 내에서의 협조를 끌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중진들의 숨은 의도
독자적으로 집권할 가능성이 낮은 소수파인 민주당이나 자민련에게도 ‘권력 분점’은 참기 힘든 유혹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에서 개헌론이 제기된 직후, 민주당과 자민련이 반색하고 나온 것도 이를 방증한다.
개헌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재미있는 현상은, 분권형 대통령제를 주장하는 강도와, 현재의 대통령 중심제에서의 집권 가능성이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에서 차기 주자군에 속하는 박근혜 의원이나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이 분권형 개헌론에 대해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반응인 반면, 주자군에 속할 가능성이 낮은 중진들이 적극적이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박상천 대표나 정균환 원내총무 등 대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진들이 영·호남 지역연합론에 바탕을 둔 ‘권력 참여’에 적극성을 비치는 반면, 추미애 의원 등 차기 주자급은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 대표가 시기 문제를 들어 “개헌 논의가 부적절하다”며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이 유효한 상태에서 상황에 따라서는 한나라당의 대표주자로 나설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재신임 논란이 불거진 뒤 사석에서 “4년 뒤는 힘들겠지만 내년 정도라면…”하고 속내를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점에서 서 전 대표 등 다른 한나라당 중진들과 행보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이 한나라당에서 먼저 불거져나왔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에 분권형 개헌을 제기하고 나선 중진들이나 이들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고 나선 의원들 대부분이, 최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대선자금 정국에 대한 대처 방식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또 최 대표와 전술적 공조를 취하면서 대폭적 ‘물갈이’를 요구하는 소장파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쪽이다. 따라서 개헌론을 제기해 당내에서 ‘사전공천심사제도’를 통한 대대적 물갈이가 본격화되는 것을 미리 차단하려는 움직임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당내 소장파들은, 이들이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과 함께 패키지로 내건 ‘도·농 복합형 선거구제’ 제안에 중진들의 기득권 유지 속셈이 묻어 있다고 주장한다. 영남 농촌 출신 의원들의 반발을 우려해 도·농 복합형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유권자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중진들에게 유리한 중대선거구를,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과 ‘빅딜’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한나라당 소장파의 핵심인 원희룡 의원은 “개헌론과 선거구제 개편 주장은 당내에서 막 불붙기 시작한 정치개혁 논의를 실종시킬 수 있는 폭발력 있는 사안”이라며 “그 제도의 옳고 그름을 떠나 중진들의 존재 가치를 키우는 쪽으로 구도를 바꾸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비판했다. 남경필 의원도 “지금 부패 청산이 진행 중인데 부패 청산이나 정치개혁, 당 개혁 등이 없이 그런 논의가 진행되면 국민들에게 야합으로 비칠 수 있다”며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정치개혁의 핵심인 제도개선과 인적청산 가운데 제도개선이 마무리된 만큼 △부정비리·부패 연루자 △인권탄압 관련자 △의정활동 무능력자 △지역감정 선동 구태정치인 등 나름대로 기준을 마련해 ‘물갈이’로 쟁점을 옮겨가려는 시점에,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을 들고 나온 데는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최병렬 vs 서청원 파워게임 벌어지나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이런 당내 구도 때문에 개헌론을 계기로 최 대표와 서 전 대표 사이에 당내 헤게모니 쟁탈전이 본격화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최 대표가 초·재선 의원 등 당내 소장파들의 물갈이 요구에 손을 들어주자, 서 전 대표가 개헌론이라는 카드로 물갈이 대상으로 지목되는 영남 중진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 대선자금으로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의 ‘탈출구’를 놓고, 대폭적 물갈이를 통한 체질개선으로 뚫어가야 한다는 최 대표·소장파쪽과 이에 반발하는 서 전 대표·당내 다수세력쪽이 충돌할 경우 파장이 적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가능하다.
한나라당발 개헌론은 일단 “정치개혁하랬더니 무슨 개헌이냐”는 반발여론과 당내 분란을 우려한 서 대표쪽의 후퇴로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간 형국이다. 그러나 내년 4월 총선 즈음까지 정국의 흐름에 따라 연기를 내뿜다 그치기를 반복할 ‘활화산’이 될 전망이다. 그저 연기만 피우다 말지, 정치권의 구도를 바꿀 만큼 큰 폭발로 이어질지 두고 볼 일이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사진/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당 의총회장에 입장하고 있다. 그의 개헌 카드는 단기적으로는 국면전환용 성격이 짙지만, 장기적으로는 총선용이라는 것으로 풀이된다.(이용호 기자)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는 보장하되, 그 권력을 나눠갖는 구조에 당연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명분이다. 명분이 서고 여건만 갖춰진다면 “따먹고 싶은 사과”인 셈이다. 그동안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은 먼저 드러내놓고 주장하기 힘든 주제였다. 대선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국회 다수 의석을 배경삼아 대통령의 권한을 반토막으로 줄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지극히 정략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최 대표는 11월13일 <한국방송> 텔레비전 토론에서 “지금 그 얘기(개헌)를 잘못 내놓으면 정략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므로 필요하면 내년 총선 후 얘기하거나 현재의 (대선자금·특검) 정국을 정리하고 생각해볼 수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제동을 걸었다. 중진모임 이전부터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의 불을 지펴왔던 홍사덕 원내총무도 다음날 기자간담회에서 “최 대표가 국민을 상대로 선언한 마당에 재론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며 개헌론 함구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면 서청원 전 대표를 비롯한 중진들은 왜 이 시점에 그런 민감한 주제를 던졌을까.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까지는 한나라당이 당했지만, 본격적인 특검 정국에 접어들면 노 대통령이 당할 일만 남아 있다. 측근 비리의 실체가 드러나면 재신임 정국 이전인 10%대 지지율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노무현 정권의 4년을 그대로 수용할 것이냐는 국민적 여론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특검법을 통과시키면서 공조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이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총선 공약으로 내걸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사진/ 민주당이나 자민련에게도 ‘권력 분점’은 참기 힘든 유혹이다. 한나라당에서 개헌론이 제기된 직후, 민주당과 자민련이 반색하고 나온 것도 이를 방증한다. 3당 총무회담.(한겨레 김정효 기자)

사진/ 당 개혁을 주장하는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 분권형 개헌론자들은 당내 대폭적 물갈이를 요구하는 이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쪽이다.(한겨레 이정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