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세력 재규합 연쇄모임 이어 언론사 국장들과도 잇따른 접촉… ‘나 홀로 국정’ 탈피 몸짓 주목
노무현 대통령이 달라지는 것 같다. 지지세력도 아랑곳하지 않던 ‘나 홀로 국정’에서 ‘더불어 함께하는’쪽으로의 변화가 감지된다. 비판세력을 향해 사사건건 날카롭게 감정을 표출하던 과거의 모습과 달리 최근 행보에선 다소 여유도 느껴진다.
변화는 당과 청와대 관계에서 실감된다. 이상수 열린우리당 의원은 10월31일 노 대통령과 전화로 대선자금 공개를 협의했다고 밝혔다. 그밖에도 대선자금 수사를 놓고 노 대통령이 “전모 공개”를 외치자 우리당이 민주당 모금내역을 ‘자진해서’ 검찰에 진술하는 등 당-청 간 코드가 척척 맞고 있다. 유인태 정무수석은 밤마다 우리당 의원들을 만나 현안을 조율하고 있다.
‘개혁 성향’ 이정우 실장에 힘 실리나
그의 변화에선 격세지감마저 느껴진다. 그는 몇달 전까지 당정 분리와 미국식 대통령제를 주장하며 야당은 물론 여당과도 거리를 뒀다. 분당 이전에 민주당 의원들이 신·구주류를 막론하고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민주당 내 분란에 관여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 심지어 정무수석실에도 ‘여의도 인사 접촉 금지령’을 내렸다. 그 결과 의도와 달리 대통령의 정치적 고립이 깊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노 대통령이 11월5일 원로 지식인 13명을 초청해 시국 현안 의견을 청취한 행사도 눈길을 끌었다. 이 자리에는 한완상 한성대 총장, 이인호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강만길 상지대 총장,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명 변호사, 김윤환 민화협 범국민협의회 고문, 송기숙 전남대 명예교수, 장회익 녹색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도 초청했지만 선약 때문에 못 갔다고 한다.
이 행사는 청와대가 ‘정권의 정체성 상실’ 논란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단서로 읽혔다. 참석자 대다수가 사회 원로인 동시에 진보 또는 개혁 진영의 지도급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간담회를 기획한 이종오 정책기획위원장은 “중요한 국론을 결정하기에 앞서 대통령이 시민사회와 접촉해 원숙하고 균형 잡힌 의견을 듣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마련한 자리”라며 “원로 지식인에 이어 ‘중견 지식인’ ‘젊은 지식인’과의 대화도 조만간 마련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내부에선 대선 당시 자문교수단 출신으로 개혁 성향 학자군의 보루로 꼽히는 이정우 정책실장에게 힘이 실리는 기류도 감지된다. 노 대통령이 보수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밀어붙이는 데 이 실장 팀이 견인차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실장 팀은 1차 부동산 대책인 9·5 조처가 무력화된 뒤 추가 대책을 마련하려고 관계 부처를 맹렬히 독려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실장은 한동안 관료집단으로부터 물정을 모른다며 ‘왕따’를 당해 ‘제2의 김태동 수석’(김대중 정부 초기 정책기획수석으로 기용됐다가 중도하차)이 될 것으로 꼽힌 바 있다.
노 대통령은 10월27일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특별한 잘못이 없는데 물러나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고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말한 것으로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실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으면 ‘오기 정치’라고 할 것 아니냐”는 말도 했다고 다른 참석자들이 전했다. 대변인의 공식 발표에는 물러나는 측근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담겼다. 반면 발표되지 않은 또 다른 발언에는 오기 부린다고 비난받으면서까지 소수의 386 측근을 붙들어둘 이유는 없다는 나름의 자신감이 엿보였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원칙 견지하되 접근기술 개선하자”
노 대통령의 11월7일 광주 방문도 큰 틀에선 지지세력을 다시 규합하는 정치적 의미가 담긴 것같다. 그는 이날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열린 아시아문화 중심도시 광주 조성계획 보고회를 주관했다. 그는 행사에서 “광주를 잊지 않고 있으며 광주·전남의 소외와 낙후에 대해 배려할 생각이니, 지역발전을 위해 신명나게 출발해달라”고 말했다. 김대중도서관 기념식에 참석해 김 전 대통령을 “세계적 지도자”로 극찬했던 흐름의 연장으로 읽혔다.
노 대통령은 6개월 전 5·18 기념식 때문에 광주 망월동 묘역을 방문했다가 한총련 시위대에 가로막히는 봉변을 당했다. 이에 청와대는 강경대응을 주문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노 대통령과 지지층이 충돌하는 흐름의 서막이 됐다.
11월4일부터 시작된 언론사 보도·편집 국장들과의 연쇄 접촉도 변화의 한 단면이다. 지난 5월 편집국장단과 논설위원들과 만났을 때는 20~30명씩을 함께 모았기에 ‘대화’라기보다는 ‘집회’ 성격이 짙었다. 참석자들의 발언 내용도 낱낱이 공개하는 조건으로 진행됐다. 반면에 이번에는 5~6명씩 묶어 저녁 식사에 동동주까지 곁들여 2~3시간씩 진행하였으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명분으로 일절 비보도 조건을 걸었다.
노 대통령은 11월5일 조선·동아·중앙·한국·세계일보 편집국장과 함께한 자리에서 “홍보수석이 제안해서 이런 자리를 한다. 5개월 전에 같은 제안이 있었다면 고심했을 텐데…”라며 자리를 마련한 경위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때와 지금은 뭔가 다른 점이 있음을 내비친 셈이다.
노 대통령은 사실 대선후보 시절과 취임 이래 언론과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주문을 수없이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주문자들이 대체로 ‘언론권력과의 타협론’에 서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타협론은 “언론의 힘이 세다. 대다수 언론사는 사주의 영향권 아래 있다. 그러니 사주들과 화해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최근 문희상 비서실장, 이병완 홍보수석, 이기명 전 후원회장 등은 노 대통령에게 “원칙을 견지하되 접근기술을 개선하자”고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언론과의 건강한 긴장관계는 유지하되 국정현안에 대한 정책 설명은 적극적으로 하자. 불필요하게 언론을 자극해 말싸움을 벌이진 말자”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이런 건의는 ‘노 대통령을 언론사주에게 투항시키려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나름의 ‘진정성’이 담긴 것으로 노 대통령이 받아들였음 직하다.
재신임 제안으로 마음을 비운 결과…
좀더 근본적으로 볼 때 노 대통령의 변화는 민주당 분당과 자신의 민주당 탈당 이후 국정운영 지지도가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면서 그동안 7~8개월을 나름대로 ‘복기’한 결과로 보인다. 한 측근은 “매도 자꾸 맞다보면 내성이 생기면서 여유와 유연성이 생기는 법”이라고 말했다.
재신임 제안 기자회견(10월10일) 직전인 10월3일 노 대통령과 장시간 무릎을 맞대고 국정운영 전반을 짚어봤다는 이해찬 의원(우리당)은 “노 대통령이 문제점들을 이미 잘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무렵부터 노 대통령이 자신의 스타일 변화에서부터 시작해 연말 개각 및 청와대 개편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위기국면 탈출 로드맵을 구상했으리라는 이야기다.
재신임 제안으로 마음을 비운 결과 오히려 운신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대통령이 던질 것을 다 던지고 나니까 오히려 주변환경이 좋아진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한 비서관은 “걸을 때 어깨를 흔드는 버릇이 있는 대통령이 요즘 좀더 활기차게 어깨를 흔든다”며 “공·사석에서 유머를 자주 구사하는 등 한결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라고 말했다.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사진/ 노무현 대통령은 11월7일 광주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광주를 잊지 않고 있으며 광주 · 전남의 소외와 낙후에 대해 배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그의 변화에선 격세지감마저 느껴진다. 그는 몇달 전까지 당정 분리와 미국식 대통령제를 주장하며 야당은 물론 여당과도 거리를 뒀다. 분당 이전에 민주당 의원들이 신·구주류를 막론하고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민주당 내 분란에 관여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 심지어 정무수석실에도 ‘여의도 인사 접촉 금지령’을 내렸다. 그 결과 의도와 달리 대통령의 정치적 고립이 깊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노 대통령이 11월5일 원로 지식인 13명을 초청해 시국 현안 의견을 청취한 행사도 눈길을 끌었다. 이 자리에는 한완상 한성대 총장, 이인호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강만길 상지대 총장,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명 변호사, 김윤환 민화협 범국민협의회 고문, 송기숙 전남대 명예교수, 장회익 녹색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도 초청했지만 선약 때문에 못 갔다고 한다.

사진/ 노무현 대통령은 11월5일 원로 지식인 13명을 초청해 시국 현안 의견을 청취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사진/ 11월5일부터는 언론사 국장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청와대사진기자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