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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시작부터 흔들리는 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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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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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 체제’ 에 쏟아지는 우려…진성당원제 · 전자정당화도 흐지부지 될 위기

정치개혁과 국민참여 등 새로운 정치를 표방한 열린우리당(약칭 우리당)이 창당대회를 앞두고 정체성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당 지지자뿐 아니라 당 내부에서도 ‘우리, 신당 맞아?’ 하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진성당원에 기반한 상향식 의사결정 원칙이 흔들리는 것도 위기의 한 단면이다.

“신선한 얼굴이 필요하지 않나”

10월27일 창당준비위원회 발족식을 거치면서 정당법상 법적 지위를 지닌 정당으로 출범한 우리당이, 신당답게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얼굴’인 것 같다. 우리당은 발족식에서 김원기 창당주비위원장, 이태일 전 동아대 총장, 이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창준위원장단으로 선출했다. 이 전 총장과 이 대표가 정치신인임을 감안하면 김 위원장에게 힘이 쏠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진/ 10월27일 열린 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 발족식. 우리당은 시작부터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한겨레 윤운식 기자)
당내에서는 ‘김원기 체제’에 대한 견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천정배 의원은 “상임중앙위원회를 비롯한 지도부 인선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원칙과 기준에 의해 이뤄져야 하며, 지도부도 간선이 아닌 직선으로 구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기남 의원은 회의 뒤 “지도부는 지분 나눠먹기나 친소관계가 아닌, 상향식 원칙에 따라 구성돼야 한다”며 “당 의장 간선제 주장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인사가 창준위원장단에 위임되는 행태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갈등 양상은 내년 초로 예정된 중앙위원회 의장(당 대표격) 선출 등 지도부 구성의 전초전 성격이 짙다.

애초 우리당은 12월 초 창당대회 전 전국 지구당을 창당한 뒤 의장을 선출하려 했다.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이 10월 초 신당 대표 경선에 참여할 뜻을 내비칠 때만 해도 ‘얼굴’이 누가, 어떤 방식에 의해 결정되느냐에 ‘반짝’ 관심이 쏠렸지만, 곧 재신임 국면으로 넘어가면서 묻히고 말았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 시기를 12월15일 안팎으로 제안하자, 우리당의 창당 구상은 창당대회를 11월11일로 한달가량 앞당기면서 일그러졌다.

김원기 창준위원장 등을 임시지도부로 ‘옹립’하되, 창당대회 이후 3개월 이내에 새 지도부를 뽑기로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난 5월16일 민주당 신주류가 신당추진모임(의장 김원기 당시 민주당 고문)을 만든 이후 굳어진 ‘김원기 체제’가 창당 이후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소장파와 신진세력 등 우리당 일각에서 번지고 있다. 연내 국민투표 실시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만큼 창당 일정을 원래대로 환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사진/ 9월9일 김원기 창당주비위원장(오른쪽에서 두번째) 등이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운영위원회의를 열고 있다. 당내에서는 벌써 ‘김원기 체제’에 대한 견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한겨레 김봉규 기자)
익명을 요구한 한 소장파 의원은 “신당 하면 뭔가 신선하고 활력이 넘쳐야 하는 거 아닌가. 김 위원장의 통합과 조정의 리더십은 높이 사지만, 국민들 눈에 비치는 우리당의 모습이 ‘전혀 신당같지 않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년 총선에서 경기 고양 덕양으로 출마를 노리고 있는 이명식 참여시대고양포럼 이사장도 이런 견해에 동조했다. “우리당이 기대를 받는 것은 미래를 담보할 인물들이 많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불임정당’인 데 반해 우리당에는 잠재적 대권주자들을 확보하고 있지 않나. 미래지향적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다.”

직선제냐 간선제냐

김원기 창준위원장을 포함한 중진들쪽에서는 당내 소장파와 신진세력들의 이런 주장에 부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김 위원장 측근의 설명이다. “김 위원장 스스로 ‘내 얼굴로 총선을 치르면 표가 되겠느냐. 적당한 분이 나서면 언제든 자리를 비울 준비가 돼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그동안 신당에 관한 이견을 조정하고 여러 의원들을 다독거리며 여기까지 끌어온 그가 누구보다도 신당의 성공적인 안착을 바라지 않겠나.”

다른 중진쪽은 “총선에서 ‘장수’는 꼭 대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가능하다”며 “‘탈레반’ 의원들은 대안세력이라기보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힌 문제제기 집단”이라고 역공을 폈다. 민주당 신당논의 과정에서 ‘개혁신당’과 ‘통합신당’으로 방점을 달리 두던, 바른정치의원모임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의원들과 재야 입당파의 갈등이 재연된 양상이다.

이런 갈등은 결국 ‘누가 당 의장을 맡느냐’는 헤게모니 싸움 성격이 짙다. 천·신 의원 등 소장파의 속내는, 임시지도부 성격의 김원기 체제를 빨리 마감하고 경선처럼 ‘흥행요소’가 있는 제도를 통해 정동영 의원을 우리당의 얼굴로 내세우려 하는 것 같다. 반면, 김 위원장 등 중진쪽은 ‘김원기 체제’의 지속 혹은 정 의원보다는 안정감과 중량감이 있는 인사에게 ‘바통’을 넘기는 것을 바라는 분위기다. 당사자인 정 의원은 표정관리를 하고 있다. 소장파들 움직임이 싫지 않으면서도 ‘정을 맞는 모난 돌’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진/ 10월26일 광주 동강대 체육관에서 열린 우리당 광주·전남 추진본부 발대식에 참석한 정동영 의원(오른쪽에서 두번째). 당내 소장파들은 정 의원을 ‘얼굴’로 나서주기를 바라는 분위기다.(연합)
본질은 ‘사람’에 관한 문제인데도, 현재 이 문제는 ‘대표 선출 방식’을 둘러싼 이견으로 비화되고 있다. 이해찬 의원 등은 “시도별 투표를 통해 중앙위원을 100명 안팎 선출한 뒤 이들이 중앙위 의장을 뽑는 방식”의 ‘간선제’를 선호하는 반면, 소장파와 신진세력들은 전 당원들의 투표를 통한 직선제를 주장하고 있다. 당 의장이 과거처럼 공천권도 없는 만큼 중앙운영위원 중에서 호선하자는 제안도 있다.

그러나 직선이든 간선이든 의사결정 구조의 뿌리가 될 ‘진성당원’ 원칙이 흔들리는 것에는 어느 쪽에서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있지 않다. 애초 우리당은 창준위 발족식까지 ‘발기인 10만명’, 창당대회까지 ‘진성당원 100만명 확보’라는 목표를 세웠다. 발기인을 모집할 때 5천원씩 참가비를 받고 당원에게는 매달 당비 2천원씩을 받아 100% 진성당원화해 당의 주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토록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웠으나, 우리당은 창준위 발족식을 1주일 정도 앞두고 ‘발기인 5천원 납부’를 슬그머니 ‘권고’ 조항으로 바꿔버렸다. 5천원은 없던 얘기로 하고, 이미 낸 발기인은 당비로 전환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우리당쪽은 “당원 가입시 당비 2천원을 내는 등 진성당원화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지만, 지구당위원장 혹은 출마 희망자가 당비를 대납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유력하게 검토해온 ‘전자당원증’ 역시 검토에만 그칠 우려가 높아졌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한 당론투표 등으로 당원들이 당의 주요한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전자정당화’ 개념도 흐릿해지고 있다. 결국 우리당이 지향했던 상향식 의사결정 구조의 근간인 당원 개념이 불투명해지면, 선출방식 논란과 별개로 당 의장 선출이나 내년 총선 후보자 경선 과정에서 기성정당의 ‘낡은 정치’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기성 정당과의 차별성

물론 “누가 돈 내고 당원 하려 하느냐”는 현실론이나 “방향을 거기 두고 점진적으로 바꿔가면 된다”는 속도조절론도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권고조항 변경’을 주도했던 민주당 출신의 한 의원은 “당원들이 민주당에서 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것도 꺼림칙해하는데, 돈 내고 발기인으로 참여하라면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여론연구소의 김헌태 소장은 우리당의 낮은 지지율과 관련해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욕구가 큰데도 신당은 인물이나 창당과정과 절차, 정책 등에서 민주당 등 기성 정당과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우리당이 지지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당으로 거듭날지, 아니면 그저 또 하나의 정당에 그칠지 주목된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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