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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청와대 ‘비둘기’들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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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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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반대해온 NSC 실무자들 가슴앓이… “전투병 보내면 사표” 배수진도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안 ‘비둘기’들이 추풍낙엽처럼 흔들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10월18일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파병을 결정하자 평소 대등하고 자주적인 대미 외교노선을 추종했던 실무 참모들의 마음이 크게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안 비둘기들의 특징은 거의가 북한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나 연구자, 혹은 시민단체 활동가 출신이라는 점이다. 더러는 유럽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하고 돌아온 이들도 섞여 있다.

시민단체 돌팔매질을 견뎌야하는 고통


NSC 사무처의 실무급 핵심 보직을 꿰차고 있는 이들중 상당수는 청와대 입성 전에 시민사회단체에 속해 있거나, 아니면 정서적으로 긴밀한 유대를 맺어왔다. 일부 인사는 학교나 연구소 등 외곽에 머물면서 주요 외교안보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시민사회단체에 논리를 제공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명서를 직접 써주기도 했다. 그런 이들에게 수백개 파병 반대 단체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추가파병을 졸속 결정이라며 던지는 돌팔매질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적지 않은 참모들이 이라크에 전투병을 보내면 그만두겠다는 반발을 보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할 수 없는 절박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 대표적인 전투병 파병 반대론자들인 박주현 국민참여수석(한겨레 김종수), 유인태 정무수석(청와대사진기자단),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국회사진기자단).(왼쪽부터). 이들은 전투병파병에 따른 지지세력 이탈을 가장 우려한다.
노 대통령의 개혁성을 믿고 청와대에 들어온 이들은 파병과 관련해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원칙적으로 추가파병은 하되 전투병은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애초 추가파병 자체를 반대했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선 셈이다. 따라서 재정적 부담과 더불어 기존의 의료·공병 부대에 수송부대를 추가해 파병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노 대통령이 개혁세력의 지지로 당선됐는데, 전투병을 파병하면 개혁세력이 등을 돌리게 돼 재신임 국민투표에서 불신임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이들의 우려다. 전투병 파병은 곧 대통령 자리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실제로 37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파병반대국민행동’(공동대표 정현백·최병모 등 27명)은 10월24일 2차 비상시국회의를 열어 파병 반대와 노 대통령의 재신임을 연계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청와대 안 비둘기파들은 파병 부대가 전투병인 것처럼 몰아가는 정부 내 매파들과 보수 여론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사실 10월18일 파병을 전격적으로 결정한 것도 미국의 압력이나 유엔의 이라크 결의안 통과 때문은 아니다. 유엔 결의와 상관없이 그날 파병 문제를 ‘논의’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파병과 관련해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언론의 비판도 부담스러웠고, 여론도 갈수록 분열되고 있어 정부가 나설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큰 방향에서 원칙을 제시할 필요가 있어 파병을 결정하고 발표한 것이다.” NSC 사무처의 한 핵심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파병 결정은 정부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투병 파병을 기정사실화하는 여론몰이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NSC 사무처의 일부 핵심 참모들은 10월18일 파병 결정 자체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투병이든 비전투병이든 상관없이 막판까지 파병 결정을 피할 수 있는 묘안을 찾고자 했으나 힘이 부쳤다고 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그동안 노 대통령이 국내 여론을 충분히 수렴해 결정하겠다고 밝혀온 터에 갑자기 추가파병을 발표하면 졸속 결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질 게 뻔한 현실을 우려했다. 더구나 이틀 뒤에는 한-미 정상회담이 잡혀 있었다. 행여 나라 안팎에 굴욕외교로 비칠지도 걱정이었다.

결국 NSC 사무처 소속의 다수가 추가파병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무현 지지층의 이탈도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지만 북핵과 관련한 부시 행정부의 미지근한 정책변화도 이들에게는 불만이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추가파병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청와대 안에서는 파병 반대론이 여전히 지배적인 기류였던 셈이다.

“물론 국내정치적 요인만이 추가파병을 머뭇거린 이유는 아니었죠. 다만 더욱 면밀한 판단이 필요했습니다. 가령 파병을 결정했는데 북핵 문제가 악화된다면 노무현 정권이 더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파병과 관련된) 어떤 결론이더라도 파병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수긍할 정도의 공정한 절차를 밟고자 했습니다.” 파병을 반대하는 쪽에 선 청와대 관계자의 항변이다.

△ 전투병 파병의 불가피론에 불을 지폈던 김희상 청와대 국방보좌관(한겨레), 반기문 외교보좌관(청와대사진기자단) 그리고 한승주 주미 대사(연합).(왼쪽부터). 이들은 돈독한 한-미 관계가 전반적 국익에 보탬이 된다고 보고 있다.

한승주 주미 대사의 입김 크게 작용

이 관계자에 따르면 비둘기파들은 파병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파병 때의 경제적 실익도 꼼꼼히 따져본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파병을 밀어붙일 만한 똑 부러지는 이익을 발견하지 못한 점이다. “이라크 등 중동 진출기업들과 여러 차례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어요. 중소기업들은 파병을 해도 경제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고, 대기업들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더라고요. 하지만 이들 주장의 근거가 모호하고 구체적인 실익을 계량화할 수 없었습니다. 좀더 치밀한 검토가 필요했던 셈이죠.” 여론도 안 좋고 경제적 실익도 보장이 안 된 상황에서 NSC 참모들이 파병 결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들이다.

하지만 파병과 같은 국가 중요 대사는 NSC 사무처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최종 정책결정에는 청와대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 반기문 외교보좌관, 김희상 국방보좌관을 비롯해 국무총리, 외교·국방·통일부 장관, 국정원장 등 거물급 관료의 종합적인 견해가 막강한 영향을 끼친다. 이번 파병 결정과 관련해서는 한승주 주미 한국 대사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광범위한 정보를 취합하고 판단을 내리는 NSC 사무처가 정책결정 과정에서 중심에 서 있기는 하나 관련 부서와 고참 관료들의 판단을 무시할 수 없는 셈이다. 이번 파병 결정은 NSC 사무처 실무자들이 노련한 국방·외교부 고위 관료나 이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청와대 안 관련 보좌관들과의 정책 싸움에서 패배했음을 보여준다. 지난 10월18일 NSC 파병 결정시에도 찬성표를 던진 관료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방·외교 라인은 모두 대규모 전투병 파병을 밀고 있다. 의료·공병을 주축으로 한 비전투병 파병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NSC 사무처의 견해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셈이다. NSC 실무자들은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하지만 비둘기파들의 주장이 앞으로 어느 정도 먹혀들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결정된 것은 이라크 평화정착과 재건을 위해 한국군을 추가 파병하겠다는 원칙밖에 없다. 파병 군대의 성격, 규모, 파병 시기 등은 결정 안 했다. 이는 국내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고, 국제정세, 국익, 한반도 평화와 안보에 미칠 영향 등을 감안해 결정할 사항”이라는 게 NSC 사무처쪽 입장이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전투병 파병을 적극 밀고 있는 ‘매파’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게 중론이다. 이미 파병을 공식 발표한 상황에서 전투병과 비전투병을 구별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견해는 파병 찬성과 반대쪽 모두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전투병과 비전투병을 엄격히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경보병이냐 아니냐는 구별이 있고, 보직이 다를 뿐이다. 공병도 어떤 측면에서는 전투병으로 볼 수 있다. 이왕 파병을 결정했다면 대규모로 보내야 한다. 그래야 인명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고, 여러 국익도 더 확실하게 챙길 수 있다. 현지 민심을 잡는 데도 많이 보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국방부의 한 고위 관계자 설명이다.

일찌감치 파병을 주장한 외교·국방 라인 고위 관계자들은 자신들을 극우파니 친미주의자로 분류하는 데 난감해한다. “가난한 가장이 많은 자식들을 먹여살리려면 자존심은 어느 정도 버려야 한다”는 게 파병 불가피론자들의 근저에 깔려 있는 신념이다. 이들은 통일이 되어 부강한 나라가 되기 전까지는 지도자가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에 보탬이 안 되는 자존심은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파병을 결정한 지난 10월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 장면. 대다수 참석자가 파병 찬성론에 지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청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은 NSC 공식결정을 따라야 하나

미국에서는 NSC와 같은 공식 정책결정기구에서 참석자 다수가 특정 정책을 지지해도, 대통령이 성격이나 소신에 따라 다른 정책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는 하되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는 전통이다. 이는 NSC가 속성상 안보우선주의라는 보수적 견해가 정책 결정을 지배하는 데 따른 폐해를 막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 노 대통령은 어떤 리더십에 속할까. ‘소신형’ 아니면 ‘추종형’. 그의 추가 한국군 파병 결정은 전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도 국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버린 걸까. 청와대 안 비둘기들은 노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리더십에 땅을 치고 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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