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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백년보다 기∼인 국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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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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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댈 수도 없고, 침묵하기도 그렇고… 적절한 수위조절에 고심하는 중진위원들의 국감보내기 백태

16대 국회 첫 국감이 벌어지는 요즘 초선의원들은 ‘첫경험’에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다. 대체로 첫 국감 성적이 임기 내내 따라붙기 때문에 “한건 건져야 한다”는 심한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전혀 다른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의원들 사이에 ‘별’ 또는 ‘상원’으로 불리는 다선급 중진의원들이다. 이들의 고민은 어떻게 자신의 ‘관록’과 ‘경륜’에 맞게 국감의 수위를 적절히 조정하느냐는 것이다. 일단 국민의 시선이 한곳에 모아지는 상황에서 무작정 놀고먹을 수는 없다. 더욱이 국감장에서 계속 손을 놓을 경우 감사대상기관들 사이에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의정활동(?)’에 상당한 지장을 받는다. 그렇다고 초·재선처럼 마구 나대기도 수월찮다. 감사대상기관을 세세하게 꼬집고 나서면 당장 “선수값도 못한다”는 비아냥이 터져나온다. 여기에 비리사실이라도 폭로하면 후배 의원들로부터 “노친네, 그 나이에 과욕을 부린다”고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때문에 이들 중진의원들은 좀스럽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도, 국감장에 적당히 품위를 지키는 나름의 방법을 찾느라 애를 먹고 있다.

JP… 한량처럼 소일하며

(사진/국감도중 한번의 질문도 던지지 않은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옆자리의 ‘짝꿍’ 민주당 허운나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다)
이번 국감에서 단연 주목받는 ‘별’은 김종필(JP) 자민련 명예총재다. 4·13 총선 이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JP는 이번 국감기간 내내 소속상임위인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거의 모든 감사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있다. 출석 정도가 아니다. 10월25일 한국전산원 등에 대한 국감 때는 아예 저녁도 거른 채 회의가 끝나는 오후 9시30분까지 자리를 지켰다. 26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 감사 때도 참석해 자리를 지켰다. 때문에 이상희 과기정 위원장 등 의원들은 몸둘 바를 모른다. 이 위원장은 시작 때마다 “대선배이시며 존경하는 김종필 총재께서 참석해 후배를 격려하시고…”라고 인사하는 게 하나의 관행이 돼버렸다.


그러나 JP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 중진들이 잘 써먹는 흔한 서면질의서조차도 낸 적이 없다. 첫 감사 때 “후배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기 위해 질의를 양보하겠다”는 정도가 거의 유일한 발언이다. 그냥 와서 하루종일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JP는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평소 대화를 즐기는 JP는 이번 감사에서 정말 짝꿍을 잘 만났다. 바로 옆자리에 민주당 초선의원인 허운나 의원이 앉은 것이다. JP는 회의도중 허 의원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면서 무료함을 달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가끔 JP의 얘기를 듣던 허 의원은 함박웃음을 짓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JP가 특기인 ‘구수하고 야한 얘기’로 허 의원을 웃기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허 의원은 “경험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정보통신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면서 한마디 정리할 때 보면 통찰력이 대단하시다”고 격찬하며 “솔직히 많이 배운다”고 말할 뿐 구체적인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국감장에서는 한량처럼 소일하고, 고생하는 후배들에게 골프접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정치9단 JP의 국감법이다.

서영훈… “아! 찜찜해”

서영훈 민주당 대표에게는 첫 국감이 시작부터 영 개운치 않다. 사실 여당 대표가 국감에 참석해도 특별히 질문을 하지 않는 게 관행이다. 하지만 그는 본의 아니게 ‘준비 안 된 국감’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원래 교육위 소속이었던 서 대표는 지난 3개월 동안 보좌진들과 특별팀을 꾸려 국감 준비를 해왔다.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대선배로서 고언도 하고 질문도 할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한길 의원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가면서 국방위를 떠맡게 된 것이다. 김 장관을 대신해 비례대표직을 인계한 김화중 의원이 교육위를 고집하는 바람에 국감 시작 이틀 전에 마지못해 자리를 양보했던 것이다.

내키지 않는 이유가 또 있다. 옮겨간 국방위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계속 만나야 하는 것도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서 대표는 이미 몇 차례 이 총재와 면담 신청을 했으나 이 총재는 아직 연락이 없다. 외면하는 사람과 계속 마주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사진기자들이 이 총재와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을 초점으로 찍으면서 자신이 들러리같이 보이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된 뒤 여간 심기가 편치 않다.

이회창 vs 이인제… 불꽃튀는 신경전

(사진/국감장에서도 대권 후보들의 신경전은 계속됐다. 국방위 국감도중 의원휴게실에 마주앉은 이회창 총재와 이인제 최고위원)
대권 ‘후보’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이회창 총재와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은 국감장에서도 경쟁을 늦추지 않고 있다. 둘 다 국방위 소속으로 자리를 함께한 때문이다.

일단 두 사람의 신경전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첫 국감장에서 두 사람은 인사도 없었다. 서로 모른 채 무시전략을 쓴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비판하는 언론보도가 잇따르자, 24일 해군본부 국감장에서는 이 총재가 먼저 미소 띤 얼굴로 이 최고위원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이 최고위원은 “여기가 내 지역구입니다”라고 말했다. 충청권 적자는 자신이고 계룡대는 자신의 텃밭인 만큼 이 총재가 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총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요”라며 짤막하게 응수했다.

국감 태도도 대별된다. 이 총재는 침묵하는 쪽을 선택했다. 국감장에 앉아 정갈한 자세와 차분한 표정으로 자료들을 훑어볼 뿐 질문을 하는 법이 없다. 그렇게 30여분 시간을 보낸 뒤 간단한 목례를 하고 총총히 국감장을 빠져나간다. 마치 출석표에 도장을 찍고 가는 식이다.

그러나 이 최고위원은 이번 국감을 마치 ‘대권후보 자질심사’의 하나로 파악한 듯 매일 질문을 쏟아내고, 국방정책에 대한 나름의 대안도 제시한다. 이 최고위원쪽은 이 총재와 대별되는 ‘실력파 대권후보’의 이미지를 심기 위해 이번 국감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판단하고, 별도로 국감준비팀까지 가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호… 어느 편에 설까?

김종호 자민련 총재권한대행은 눈치보기 감사행태로 정치권 안팎에서 눈총을 받는다. 통일외교통상위 소속인 김 대행은 갑갑한 문제가 불거질 때면 위원직을 사임하고 후배에게 바통을 넘겨 총대를 메도록 하고, 잠잠해지면 다시 보임해 상임위장에 나타나는 이른바 ‘사·보임’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10월11일 외통위 감사 때였다. 김 대행은 정진석 수석부총무를 대신 상임위장에 보내 민주당이 극렬히 반대하는 임동원 국정원장의 증인선정을 막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론인 줄 알고 따랐던 정 의원은 뒤늦게 김 대행이 민주당쪽 설득에 넘어가 개인적으로 당론과 배치되는 지시를 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당했다”면서 수석부총무직을 내던졌다. 그는 17일에도 표결이 이뤄질 듯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상임위에 자기 대신 송광호 의원을 내보내는 ‘사·보임’ 소동을 일으켜 증인선정이 늦어지도록 했다. 그리고 20일 국감장에서는 결국 박지원 전 문화부 장관과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의 증인선정은 찬성하고 임동원 국정원장과 정몽헌 아산재단이사장에게는 반대표를 던졌다.

김옥두… 이젠 여당 중진, 스타일 바꾼다

(사진/국감장에서는 한량처럼 소일하고, 고생하는 후배들에게 골프접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정치9단 JP의 국감법이다)
김옥두 민주당 사무총장의 국감 스타일도 변했다. 그는 과거 국감장에서 메가톤급 비리폭로와 매서운 질책으로 ‘저승사자’로 통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 얘기만 나오면 물불 안 가리고 온몸을 던져 방어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국감장에서 그는 “종이 저승사자”로 불린다. 잔뜩 몸을 사리는 것이다.

발단은 지난 10월19일 경기경찰청 국감장 발언파동 때문이다. 이날 야당의원들은 경기경찰청장을 상대로 지역편중인사와 4·13 총선 수사편파를 따졌다. 이때 김 총장은 평소처럼 참지 못하고 “국민의 정부에서는 지역편중인사는 없다”고 목청을 높이며 오히려 야당의 정치공세를 압박했다. 야당 소장 의원들은 김 총장의 이런 태도에 흥분해 퇴장했고, 국감은 파행을 거듭했다. 가까스로 하순봉 의원 등 한나라당 중진들이 소장파 의원들을 설득해 국감장에 앉혔다. 그리고 이날 저녁 김 총장이 마련한 저녁식사자리에서 하 의원 등은 따끔한 충고를 했다. “여당 사무총장은 국감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의원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사사건건 나서지 말고 품위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뒤부터 김 총장의 태도는 확 달라졌다. 더욱이 총장 자신의 발언이 곧 “여권 핵심부의 생각”으로 비쳐지자 아예 공개질의를 하지 않고 서면질의로 국감방침까지 수정했다.

최병렬… “건드리면 터져요”

최병렬 한나라당 부총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으로 불린다. 평소에는 품위를 지키지만 누구든 그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여지없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최 부총재의 이런 성격은 지난 23일 정보통신부 국감장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안병엽 정통부 장관은 이날 IMT-2000의 기술표준과 관련해 한때 “업계자율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뒤늦게 “동기식 1개, 비동기식 2개로 하겠다”고 발언해 놓고도 이런 사실을 부인했다.

휴게실에서 이를 지켜보던 최 부총재는 이런 태도를 참지 못하고 회의장에 뛰쳐들어갔다. 그리고 과거 안 장관의 각종 인터뷰 기사를 총동원해 그를 공박했다. 그리고 이런 말로 결론을 맺었다. “장관, 소신을 끝까지 밀고나가든지, 소신을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으면 사표를 내고 그만둬라. 그래야 다음 사람이 와서 새롭게 일을 하는 것 아니냐. 1년을 해도 장관, 2년을 해도 장관인데 세상에 대한민국의 장관이 어떻게 말을 바꾸고도 안 했다고 할 수 있냐.”

정덕수/ 매일경제 정치부 기자dsjang@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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