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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민련 ‘몽니’도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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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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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감에서 한나라당 편들며 위세 과시했으나 당 쇄신의 근본적 대책은 여전히 고민거리

(사진/자민련 안팎에서는 빨리 전당대회를 열어 지도부 개편 등 당 체제를 쇄신하자는 의견이 광범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자민련 의원총회 모습)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10월9일 영수회담을 통해 ‘상생의 정치’를 선언한 뒤 ‘왕따’ 속에 ‘배신감’ 곱씹으며 울분을 삭이던 자민련이 모처럼 복수에 나섰다. 상대는 민주당. 방법은 국정감사장에서 한나라당 편들기다.

당당한 건 겉모습뿐

10월23일 오후 7시40분,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국감장. 국정홍보처에 대한 국감이 끝나자 한나라당 의원들은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박세직 전 월드컵조직위원장을 증인으로 채택하자”며 표결을 요구했다. 정부의 언론대책과 월드컵조직위원장 교체 등을 추궁하겠다는 이유였다. 다급해진 민주당은 최재승 위원장까지 나서 “양당 간사간 의사일정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버텼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의석비율이 9 대 9인 상황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자민련 정진석 의원이 한나라당에 동조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애가 탄 민주당은 회의실 외부 마이크까지 끈 채 비공개로 1시간 동안 한나라당과 밀고당기는 설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간신히 표결을 피했다. 하지만 다음날인 24일 문예진흥원 국감장에서 끝내 표결이 이뤄졌다. 정 의원은 예상대로 한나라당쪽 손을 들어줬다.


나흘 전인 10월20일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김종호 자민련 의원(총재권한 대행)이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과 서영훈 민주당 대표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황장엽씨와 박지원 전 장관을 증인으로 채택한 데 이은 두 번째 보복이었다.

자민련 지도부는 이런 결과에 상당히 고무된 눈치다. “교섭단체가 아니면 어떠냐. 더이상 구걸할 생각은 없다. 우리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의정활동을 계속하겠다”(이양희 총무), “민심이 서서히 자민련쪽으로 돌아오고 있다”(김현욱 지도위의장).

실제 자민련은 민주당을 흔드는 데 성공했다. 다급해진 서영훈 민주당 대표는 10월27일 아침 김종호 총재권한 대행에게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국회법 개정에 최대한 노력하겠다”며 “검찰수뇌부 탄핵안이 통과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김 대행은 확답을 피한 채 “국감 뒤 의원총회에서 결정하겠다”는 원칙적 발언만 늘어놨다. 확실한 뭔가가 보장되지 않으면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처럼 ‘본때’를 보인 자민련의 이런 당당함은 겉모습일 뿐이다. 최근 자민련의 속내는 그리 편치 못하다. 내부 고민과 갈등이 너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민주당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민련 당직자들 다수는 최근 크로스보팅 전략의 효과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저 약자의 설움을 느낄 뿐이다. 당의 존립문제 때문에 객기는 부리지만 솔직히 뭐가 될 것 같지 않다.”(자민련 한 재선의원) “민주당이 조금 움직였다고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다. 여태껏 민주당과 함께하다, 교섭단체가 안 된다고 한나라당에 붙는 우리 모습이 국민들에게는 그저 오락가락하는 기회주의적 모습으로 비쳐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면 자민련과 JP가 ‘박쥐처럼 처신한다’며 여야 모두로부터 배척당할 수 있다.”(자민련 한 핵심 당직자) 겉으로는 “국민의 뜻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는 자민련의 독자행동이 효과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왕따’와 ‘배신’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인데다, 한계 또한 명확하다는 것이다.

실제 한나라당은 자민련의 도움에 즐거워하면서도, 교섭단체 요건 완화 불가라는 당론을 수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총재의 한 측근 의원은 “그쪽이 급해서 그러는데…. 당론을 바꿀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도 사정이 비슷하다. 계속되는 자민련의 ‘몽니’에 교섭단체 요건 완화 실현을 약속했지만, 한나라당의 반발과 여론의 역풍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를 관철할 명분이나 힘이 없다.

기형적 구조, 이러단 망할 수도

(사진/김용환 한국신당 대표를 당 총재로 추대해 위기를 돌파하는 방안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김 대표는 급할 게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민련 안에서는 당을 살리는 좀더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솔직히 지금처럼 기형적인 당 구조와 소극적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전당대회를 열어 당을 근본적으로 쇄신해야 한다.”(다른 한 재선의원) 빨리 전당대회를 열어 지도부 개편 등 당 체제를 쇄신하자는 것이다. 자민련 안팎에서는 이미 이런 의견이 광범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일단 강창희, 정우택, 이재선 등 이른바 ‘소장파’ 의원들은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당직을 맡은 몇몇 의원들까지 공감하는 눈치다. “국정감사중에 전선을 분열시킬 수 없어 침묵할 뿐이지, 이대로 갈 수 없다는 게 공통의 인식이다. 정기국회가 끝날 때쯤이면 전당대회 문제가 공론화할 것이다.”(자민련 한 고위당직자)

이들 당 쇄신론자들은 대체로 “지금처럼 명예총재-총재-총재권한대행의 기형적 구조로는 위기돌파는 물론, 당을 계속 유지하기도 힘들다”고 진단한다. 명예총재인 JP는 은둔정치를 계속하고, 이한동 총재는 당의 총리직 사퇴요구를 뿌리치고 국무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다. 사실상 DJ편에 선 셈이다. 더욱이 김종호 대행은 당 안팎에서 지도력을 의심받고 있다. 현재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을 상대로 미묘한 흥정을 계속하면서 당을 이끌 수 있는 정치력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김 대행은 민주당의 설득으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서 ‘임동원 국정원장의 증인 출석’ 당론을 바꿨다는 의혹을 샀고, 이 때문에 정진석 수석부총무가 부총무직을 사퇴하는 등 불열과 갈등을 부추겼다.

문제는 어떻게 자민련을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냐는 것이다. 당 쇄신론자들은 전당대회를 통해 “명예총재인 JP가 전면에 나서 당을 기사회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는 세와 명분인데 자민련은 두 가지 모두를 잃었다. 더이상 칩거와 은둔으로는 안 된다. JP가 전면에 나서 당당히 당을 추스르며 정치적 배팅을 해야 한다.”(한 소장파 의원) JP가 총재직에 복귀해 DJP 공조를 회복하든 민주당과 합당을 하든 한나라당과 한배를 타든, 뭔가 적극적으로 배팅해야만 자민련의 살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문제는 JP를 비롯한 주류쪽이 쇄신파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라는 데 있다. 일단 전당대회가 열리면 4·13총선 패배와 최근 당 상황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벌써 몇몇 소장 당직자들과 원외위원장들 사이에는 “JP로는 자민련이 제2의 부흥기를 맞을 수 없다”면서 “책임지고 뛸 수 있는 젊은 사람을 내세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물론 아직 다수는 JP 중심으로 돌파구를 모색할 수 있다는 쪽이다. 5%의 지지율로 국가권력의 절반을 차지할 수는 없어도 JP에게 충청권을 기반으로 배팅할 정도의 힘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판단은 검찰 수뇌부 탄핵안이나 예산안 처리 등 자민련의 힘을 과시할 기회도 많고 차기를 노리려면 누구든 JP의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는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자민련은 치명적인 딜레머를 안고 있다. 이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JP가 당장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JP는 절대 컴백 안 한다. 바다에 낚싯바늘 하나 던져놓고 뭐든 확실히 물 때를 기다릴 뿐 지금처럼 전망없는 당을 책임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명을 유지했다.”(자민련 한 당직자) 김현욱 지도위원도 “JP의 당무복귀가 가장 바람직한 카드지만 현재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치권에 큰 틀의 변화가 생길 때 움직이지, 희망없는 비교섭단체의 총재를 맡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 법. JP가 머뭇거릴수록 그의 2선 후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당은 급속히 이완될 게 불보듯 뻔하다. 한 당직자는 “JP가 계속 운둔한다면 자민련은 이름이나 겨우 유지할 뿐 급속히 분해될 것”이라며 “그때는 혹시 기회가 오더라도 JP에게는 그 기회를 잡을 힘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대체 누가 나설 것인가

JP를 비롯한 몇몇 주류쪽 인사들도 이를 인식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김용환 한국신당 대표를 당 총재로 추대해 위기를 돌파하는 방안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한 재선의원은 “김용환 정도 술수는 돼야 위기상황에서 당을 유지하며 미래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런 해법에 동조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적잖은 걸림돌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김 대표는 급할 게 없다. 당과 충청권에 대한 확고한 장악력을 보장받지 않고는 자민련 총재 자리를 맡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김 대표는 최근 주변사람들에게 “(자민련에) 쉽게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민련에서조차 “가만히 있어도 얻을 게 많은 김 대표가 JP의 ‘얼굴마담’ 역할을 하겠냐”는 말이 나돈다. JP가 사실상 정계 은퇴나 다름없는 이런 선택을 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김 대표가 당 총재를 맡겠다고 나서도 문제다. ‘밥그릇’이 한정된 현실에서 이한동 총재나 김종호 대행 등 기득권 세력이나, 소장파로부터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되고 강창희 의원 등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외통수’에 몰린 자민련의 위기 탈출법은 JP의 결단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러나 JP는 입을 굳게 닫고 있다. 그저 국정감사장에서 자리나 지킬 뿐이다. 다만 JP의 의중을 대변하는 이양희 총무는 “전당대회는 무슨 전당대회냐. 명예총재나 총재, 권한대행 모두 역할분담을 잘하고 있는데…”라며 당 쇄신론에 쐐기를 박았다. 이 총무는 특히 ‘JP 2선후퇴론’에 대해 “김 명예총재가 이끄니까 그나마 당이 견디는 것 아니냐. 의원 수도 적은 당에서 힘을 모아줘야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면서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뚜렷한 대안이 없는 만큼 일단 함께 버티면서 상황이 좋아질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또 무작정 버틴다고 좋은 시절이 올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게 위기의 자민련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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