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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무당적이냐 즉각 신당행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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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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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장 동의안 부결로 고립 심화된 노무현의 고민… 탈당 뒤 신4당 체제 속 활로는

국회가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의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자 청와대와 통합신당은 다른 정당들이 명분 없이 국정의 발목을 잡았다고 비난했다. <중앙일보>가 국회 표결 당일(9월26일) 실시한 여론조사(전국 성인 749명)에서도 동의안 부결이 ‘잘못된 일’(30.8%)이라는 응답이 ‘잘된 일’(22.8%)이라는 응답보다 많았다.

사진/ “아, 지독한 여소야대여.” 윤성식 감사원장의 동의안 표결중 대책을 논의하는 통합신당 김근태 대표와 당 지도부.(이용호 기자)

사실상 무장해제당하는가

그러나 정파간의 정치 공방보다는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고립’이 국회 표결로 확인된 점이 이번 사태의 더욱 큰 의미인 것 같다. 감사원장을 하기에 결정적 흠결이 없는 윤성식 후보자를 내세웠는데도, 국회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다른 인사 관련 동의안이나 법안도 국회에서 처리하지 못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이 사실상 ‘무장해제’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임명동의안 찬성 87표, 반대 136표, 기권 3표, 무효 3표(재적의원 272명 중 229명 참여)라는 결과는 민주당 분당의 결과가 일차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종전의 민주당 의원이 101명이었으니 분당 없이 결속하고 한나라당 의원 10여명만 찬성으로 넘어오면 가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분당으로 표가 갈린데다, 민주당 일부와 한나라당 의원들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감정적인’ 투표 행태까지 나타났다. 김근태 통합신당 원내대표는 다른 정당 의원들이 “국정과 감정을 뒤섞었다”고 비판했다.

의원들이 국정에 감정을 섞어선 안 된다는 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노 대통령이 종종 표현하듯이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지독한 여소야대가 문제”임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선 노 대통령이 의원들한테 감정까지 사면서 정치적 고립이 깊어진 이유도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신4당체제에서 노 대통령과 정권의 활로를 찾으려면 ‘남탓’과 ‘제탓’이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국회 표결 전날인 9월25일 청와대 기자실인 춘추관을 찾아 국회의 협조를 호소했다.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은 여야 4당 대표와 원내총무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사진/ ‘허탕’. 9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이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의 국회임명 동의 협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러나 여의도에선 “평소에 국회를 무시하면서 관심도 보이지 않다가 아쉬워지니까…”라는 반응들이 나왔다. 노 대통령이 그동안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정치’를 표방하면서 상대적으로 국회를 경시한 인상을 준 탓에, 감정이 쌓였던 셈이다.

‘국민 직접 상대론’은 당략에만 몰두하는 기성 정치권보다는 국민여론에 직접 호소해 거꾸로 국회를 압박한다는 논리로 나름의 타당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런 접근방법이 성공하려면 대통령의 지지도가 높고 언론이 공정하게(또는 우호적으로) 보도해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한데,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감사원장 인준을 앞둔 시점에서 노 대통령이 민주당 잔류파를 ‘기득권 세력’(9월17일 광주·전남 언론인 간담회 등)이라며 비판하고 신당 지지 발언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한화갑 민주당 전 대표 등이 “자신을 당선시켜준 당에 대한 배신행위, 배은망덕”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할 구실을 일부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노 대통령이 민주당의 신·구주류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오던 것에 비춰보면, 그의 신당지지 발언은 다소 뜻밖이었다. 청와대 참모들도 “언론인들이 물어보니까 솔직한 성품대로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 같다”고 설명했다. 참모라인의 조언을 토대로 발언의 시점과 효과를 정교하게 계산하진 않은 셈이다.

총선전 정부법안 처리 막막

어쨌든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회와의 관계 설정을 좀더 서둘러야 하겠다. 신4당 체제에서의 활로와 총선 구도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로 민주당 탈당 문제는 감사원장 인준동의안 부결 사태로 오히려 쉽게 정리될 여지가 생겼다. 민주당의 상당수 의원이 부결에 가세한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민주당적을 벗어던질 명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애초 민주당 탈당을 11월 말이나 12월 초까지 최대한 늦추려 했다고 한다. 한 참모는 “통합신당이 별도 교섭단체를 구성했다고는 하나 법적으로 볼 때 분당이 완성되는 것은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중앙당을 창당해 선관위에 등록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애초 계산은 민주당이 제기할 ‘노무현 배신론’(민주당과 호남에 대한 배신)의 파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한 참모는 “민주당에 잔류한 구주류는 노 대통령의 탈당을 최대한 쟁점화해서 호남표를 노 대통령과 통합신당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생각”이라며 “우리는 그 반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마당에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감사원장 부결투표에 가세함으로써 노 대통령은 거꾸로 민주당에서 ‘떼밀려나가는’ 모양이 됐다. 이에 따라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의 탈당 시점을 애초 구상보다 앞당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탈당 시점으로 10월11일 국회의 국정감사가 끝난 뒤 10월13일 대통령의 정기국회 시정연설을 전후한 무렵을 거론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정연설 전에 민주당적을 정리한 뒤 시정연설을 통해 그 이유와 국회와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는 시나리오인 셈이다.

두 번째 쟁점은 각종 정부법안을 국회에서 어떻게 원활히 처리하느냐이다. 한 청와대 참모는 “대통령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이것”이라고 말했다. 지방분권이나 정부혁신, 부동산 투기 억제 등을 위한 입법이 올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참여정부 5년간의 국정 로드맵이 통째로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이와 관련해 답답함을 털어놓고 있다. 감사원장 후보 인준부결 당일 노 대통령은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으며,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은 “해도해도 답이 안 나온다”고 했다. 청와대는 애초 여야 정당과 등거리를 유지하며 사안별로 협력하는 것이 ‘순수한 미국식 대통령제’라며 효험을 믿어왔으나, 이제 벽에 부닥쳤다.

‘무당적 정책연합론’에 쏠린 관심

이를 두고 이강래 의원(통합신당)은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자가 정책감사 위주로 감사원을 개혁한다는 명분은 있지만 경륜면에서 부족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며 “인사 관련 동의안이든 법안이든 최대한 합리적으로 안을 다듬어 시비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그동안 청와대 참모들이 국회와의 협력 문제를 너무 순진하게 접근했다”며 “그런 발상으로는 국정을 제대로 끌고 나가기 어렵다”고 참모들의 ‘아마추어리즘 극복’도 주문했다.

사진/ 강자의 여유.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처리를 위한 국회 본회의에 앞서 의원총회를 열고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이용호 기자)
그러나 법안을 제출해야 할 정부 부처에선 “내년 총선 이전까진 이미 새로운 법안 처리는 물 건너간 것 같다”는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중앙부처의 한 차관은 “국회 상임위원들을 상대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노력이야 해보겠지만 솔직히 결과는 자신할 수 없다”며 “차라리 내년 총선까지 입법 추진을 유보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 쟁점은 노 대통령이 민주당 탈당 뒤 통합신당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한 가운데 내년 총선을 맞을지에 관한 것이다.

청와대에는 현재 ‘무당적 정책연합론’이 우세한 상태다. 유인태 정무수석은 “(노무현 대통령이) 무당적으로 (각 정당과) 정책연합을 하는 방안이 가능성이 꽤 높은 카드”라며 “쟁점 현안에 대해 정부와 가장 가까운 태도를 견지한 정당과 정책적인 연합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할 구상”이라고 말했다.

무당적 정책연합론은 대통령이 특정 정당에 가입하면 다른 정당들이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최우선 과제인 국회 법안처리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논리로 요약된다. 청와대의 한 참모는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한 뒤 즉시 신당에 입당하면 국회 법안처리 과정에서 마찰과 공격이 극심할 것”이라며 “무당적 정책연합을 포함해 여러 가능성을 검토하되, 결정은 최대한 늦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통합신당에는 무당적 정책연합론을 비판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천정배 의원은 “신당이 노무현 정권을 좀더 개혁적으로 견인하되, 정권과 정책의지를 함께하는 것은 분명하다”며 “그렇다면 대통령의 당적도 정당정치 원리에 따라 결정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이강래 의원도 “노 대통령과 신당의 관계를 국민들이 모두 아는 마당에 ‘무당적 정책연합’을 한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이라며 “대통령의 신당 입당 시기와 모양은 따로 검토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궁색한 고려들

청와대가 무당적 정책연합론에 쏠린 것은 여러 궁색한 고려가 함께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통합신당의 지지도가 낮은 마당에 섣불리 몸을 담았다가 총선에서 함께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걱정이 엿보이며, 신당에서 대통령한테 당장 가입해달라고 하지 않는 점도 청와대 참모들은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는 노 대통령이 무당적 정책연합에 계속 기대기보다는 시기가 언제든 결국 신당에 입당하게 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신당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무당적 상태로 총선을 맞을 경우 대통령의 본의와 무관하게 중간평가를 피해 달아난다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라며 “그 경우 총선 이후에 모든 정당이 등을 돌림으로써 오히려 대통령의 정치적 고립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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