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 평화정착 위해 우리 사회 내부부터 변화시켜야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는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남과 북 사이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고 반세기 동안 끊겨 있던 경의선도 다시 이어지고 있다. 경제협력과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논의들도 활발하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또다른 축인 북한과 미국도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정상화의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다.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이달 초 미국을 방문한 데 이어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23일부터 사흘 동안 평양을 다녀왔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도 예정돼 있다. 30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11차 북·일 수교협상이 진행되는 등 북한의 국제사회 복귀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21>은 10월26일 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 교수, 김연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서주석 국방연구원 북한군사연구팀장 등을 초청해 숨가쁘게 전개되는 한반도 정세변화의 의미와 향후 전망 등을 짚어보았다.
서주석 먼저 북-미관계가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 과정부터 짚어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사실 북한과 미국의 관계정상화는 94년 제네바 합의에서 이미 나온 얘기다. 현안 해결의 정도에 따라 대사급 외교 수립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핵 투명성과 미사일 문제로 지연됐다. 사실 북·미의 접근은 서로의 필요성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는 체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수적이다. 미국도 북한의 미사일 문제 등 국제적 안보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북-미관계 개선은 6월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북-미 관계, 어디까지 진전될까
이철기: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 큰 지각변동이 이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냉전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울 수 있다. 속도조절론도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냉전의 섬’인 한반도에서 냉전이 해체되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 시작됐다. 북-미관계 개선이 빠른 속도로 진전되는 것은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 북한은 탈냉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체제안정을 보장받는 것이 국가목표다. 북한으로서는 11월7일 미국 대선에 앞서 북-미관계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긴박성이 있을 것이다. 공화당이 집권하면 국제정세가 더 불리해질 수 있다. 미국도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한 것 같다. 하나는 국내 정치상황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중동평화를 외교적 성과로 내세웠는데, 결국 잘 안 됐다. 그래서 대선을 앞두고 북-미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또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 획복을 겨냥해 북-미관계의 조기개선에 나선 것이 아닌가 싶다.
김연철: 북-미관계 개선은 북한의 경제문제 해결, 더 나아가 남북경협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우선 북한산 제품의 수출문제와 관련돼 있다. 테러지원국 해제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북한제품의 수출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북경협 확대도 한계가 있다. 또 철도, 통신, 전력 등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대한 필요성이 크게 제기되고 있다. 이를 위한 막대한 재원 마련은 아시아개발은행이나 월드뱅크 같은 국제금융기구의 차관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도 대미관계 개선이 필수적이다. 전략물자 반출과 관련된 사항도 있다. 미국의 경제제재나 테러지원국 지정 등이 존속하는 한 기술집약적 경협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북-미간 관계개선은 단순 노동집약적 경협뿐 아니라 기술집약적 경협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서주석: 북-미관계의 급격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북-미간 관계정상화가 바로 이뤄질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중국의 경우 닉슨의 방중과 중·미 수교는 7년의 시차를 뒀다. 베트남도 미국이 베트남과의 관계개선 일정표를 제시한 뒤 4년 만에 수교됐다. 더욱이 북-미간 현안에는 구조적인 것이 많다. 북한 미사일 문제도 간단치 않다. 미사일 발사중단을 위해서는 경제적 대가가 필요하다. 미사일 수출 문제도 북한은 3년간 연 10억달러를 요구하고 있다. 이 비용의 조달과 분담문제 등 미사일 문제 해결까지는 산 넘어 산이다. 또 미국의회의 북한에 대한 거부감도 고려해야 한다. 북한은 내부의 문제는 적다. 군부의 반발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정에 대한 결정적 반대는 없을 것이다.
이철기: 북·미 수교는 사실 94년 제네바 합의 내용이다. 양쪽은 현안문제가 진전됨에 따라 대사급 수교로 가기로 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걸림돌은 미군유해 송환과 미사일 문제다. 유해송환은 잘 해결돼 가고 있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발언을 보면 미사일 문제도 중대한 진전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미사일 문제는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시험발사와 수출, 개발 이렇게 3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시험발사 중단은 지난해 9월 북-미간 베를린 합의를 통해 북한이 시험발사를 유예한다고 약속했다. 수출중단에 대해서는 북한이 3년간 연 10억달러를 보상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현금보상은 어렵다. 따라서 이 문제 해결은 테러지원국 해제를 통해 북한이 국제기구에 가입해 국제사회로부터 지원을 얻는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북·일 수교를 진전시켜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도록 하는 방식도 있다. 미사일 개발자체를 중단하는 문제는 더 어려운 문제다. 들리는 바로는 북한이 인공위성을 대신 발사해 주면 중거리 미사일 발사를 안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사일 개발중단을 위해서는 북한체제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남한과의 재래식 군비경쟁에서 뒤진 상황에서 미사일의 군사전략적 의미는 굉장히 중요하다. 어쨌든 미사일, 테러지원국 해제, 주한미군 등 모든 문제는 서로 상당히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포괄적 협상에 의해 타결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북-미관계가 어느 수준까지 진전될까가 문제인데, 연락사무소는 제네바 합의문에 의하면 벌써 설치가 됐어야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연락사무소의 단계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단계로 바로 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대사급 관계로 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11월7일 미국 대선결과가 중요하다. 향후 관계정상화는 차기 정권의 과제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에서도 대표부 설치 정도는 합의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변수는 미 대선이지만…
김연철: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클린턴 임기 내에 북-미관계의 큰 틀은 합의되겠지만, 구체적 현안에 들어가면 상당히 협의의 여지가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선결과가 아닐까 한다. 부시가 집권해도 큰 틀은 유지될 것으로 본다. 남북정상회담 성과가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반도의 현재 상황을 무시하고 정책결정을 할 것으로 보긴 어렵다. 그러나 아무래도 부시가 집권하면 구체현안 해결의 방안에는 차이가 날 수 있다.
이철기: 공화당이 집권하면 북-미관계가 지금보다는 경색될 것으로 본다. 공화당이 집권해도 페리 프로세스(Pery Process)의 기조는 유지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페리 프로세스 자체가 미사일과 핵 확산 저지를 일차적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푸는 방법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다를 수 있다. 공화당이 집권하면 바로 미사일과 핵 문제에 대한 북한의 일방적 양보를 강조할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북-미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 또 공화당의 지지기반이 군수산업체인 만큼 국가미사일방어체계(NMD)나 전역미사일방어체계(TMD)가 강력하게 추진될 가능성이 있어 변수가 될 수 있다.
서주석: 지난해 11월 나온 공화당 하원 보고서에서는 북한 정권·체제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물론 부시가 집권해도 의회 차원의 이런 요구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페리 프로세스라는 것은 의회를 지배하는 공화당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문서이다. 따라서 강온 양면책이 모두 포함돼 있다. 부시가 집권해서 북한 미사일에 대해 훨씬 가혹한 조건을 내세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이 강력하게 반발할 경우 위험상황이 돌출할 수 있다. 이 경우 불똥이 남북관계에도 튈 우려가 있다.
김연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의 선택이 아닐까 한다. 부시냐, 고어냐에 관계없이 북한이 미사일·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접근하면 협상국면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또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다. 한반도의 전체적 정세를 관리하고 나름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남북관계의 기본 틀을 유지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서주석: 국내 문제도 만만찮다. 최근 속도조절론이 불거지지 않았느냐. 물론 속도조절론은 국내의 수용 태세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국내적 합의 도출의 노력이 계속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 개선이나 대북지원의 계속성을 위해 국회차원의 동의 같은 게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국내적으로 대북관계 개선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도 껴안으면서 대북정책을 추진해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탄탄한 기반 위에서 대북화해가 추진된다면 미국의 정권 변화가 결정적 문제는 안 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철기: 대북정책에서 국민적 합의는 당연하다. 그러나 대북 화해정책을 방해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국회 동의문제도 그렇다. 6·15공동선언이나 합의사항, 대북 식량지원 등에 대해 국회동의 절차를 밟자는 주장인데, 한 가지 짚고넘어가야 할 것은 90년대 초 시민단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비준 동의하자고 주장했을 때는 반대하던 사람들이 지금 국회동의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김연철: 중요한 것은 국민적 합의를 이룰 구체적 방법이 뭐냐는 것 같다. 사실 지금까지 분단체제가 지속되다보니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할 사회적인 수준이랄까, 이런 것이 부족한 것 같다. 예컨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북관계를 두고 속도조절론이 많이 지적됐다. 그러나 올브라이트 장관이 평양을 다녀오고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얘기가 나오면서 이제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주미종남(主美從南)을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남북관계 개선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얘기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속도가 느린 게 걱정이라는 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문제다.
4자 회담의 역할 재조명
이철기: 한반도 정세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내부는 거의 변화하지 않는 것 같다. 냉전체제를 반영하는 제도나 의식을 변화시키는 일들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가보안법 개폐도 필요하고, 심지어 남북교류협력법 자체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
서주석: 이남제미(以南制美)니, 통미봉남(通美封南)이니 하는 이상한 한자조어들은 북쪽이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남북관계를 이용하는 책략을 쓴다는 논의들인데, 9월까지는 남북관계가 순조롭게 지속되다 10월 이후 이산가족 상봉이나 경의선 복원을 위한 실무접촉 등이 지연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쪽으로서는 대외관계의 총체적 변화를 겪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인적 물적 자원, 역량의 부족을 실감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사실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관계 개선은 시기에 따라 교차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북-미관계 진전의 국면이고, 추후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의 서울 방문이 이뤄지면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국면으로 가는 것 아니겠느냐.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관계 개선이 서로 교차적으로 이끌어주는 방향으로 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철기: 평화체제 문제로 논의를 돌려보자. 북-미협상에서는 아무래도 주한미군 문제나 평화협정 문제 등이 포괄적으로 얘기될 것으로 보이는데, 주한미군의 경우 지위변경 문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준비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면 유엔사 해체는 불가피한 것이고 따라서 주한미군 지위변경이 불가피한 것 아니냐. 이 과정에서 4자회담의 역할이 조명되는 분위기인 것 같다. 조명록 특사가 미국을 방문해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주목되는 것이 평화체제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다. 공동성명에서 북·미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평화체제의 수립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며 4자회담 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것은 긍정적 변화가 아닌가 싶다. 북·미 양자회담을 고집했던 북쪽이 남쪽의 주장인 2+2방식(정리 주=남북이 당사자로 협정을 맺고 미국과 중국이 보증하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이 이뤄지면 평화협정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연한 자세를 가질 수 있다는 태도 변화로 보인다. 따라서 평화협정의 현실적 해결방법은 2가지 협정을 동시에 체결하는 방식이다. 하나는 2+2방식의 협정을 하나 체결하고, 또 하나는 미국과 북한간 협정을 따로 체결하는 것이다. 어차피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발전하면 양국관계를 규정하는 협정이 필요할 것이고 이 협정에 미국이 북한의 체제안정을 보장하는 내용 등을 포함하는 방식이 현실적으로 타당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서주석: 북-미간 공동코뮤니케를 보면 적어도 평화문제와 관련해서는 주한미군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지금 단계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대미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관측도 가능하다.
일본도 화해 흐름에 따를 것
이철기: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시점에서 주한미군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남과 북, 미국 3자의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북쪽의 생각은 주한미군이 북쪽에 군사적 위협을 주지 않는 중립적 위치가 된다면 받아들이겠다는 것 아닐까 싶다. 주한미군 문제는 이 문제가 안 풀리면 한반도 평화문제가 안 풀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서주석: 북·미 수교가 이뤄지고 평화체제가 수립되면 주한미군의 위상전환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것을 남과 북, 미국 3자가 할 것인가는 이론이 있다.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둔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요구를 받아서 한·미 양자가 전향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김연철: 북-미간 급속한 접근으로 북한의 국제적 관계개선도 급물결을 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전후배상금은 북한경제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남쪽 입장에서도 경협활성화를 위해 북한의 사회간접 투자가 필요한데 남쪽의 재정능력으로는 어려움이 많다. 그런 차원에서 일본의 참여가 남북관계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물론 북-일관계 개선의 걸림돌도 있다. 일본인 납치문제, 전후보상 책임문제뿐 아니라 일본 내부의 반북 분위기도 문제다. 그러나 북·미와 남북의 두축이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로 가면 북-일관계도 여기에 맞춰갈 것이다.
이철기: 일본의 입장은 미국보다는 앞서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만 소외되는 모양은 곤란하기 때문에 일본도 북-일관계 개선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다. 일본의 50만t 식량지원도 그런 맥락인 것 같다. 북한과 일본은 10월 말 11차 수교회담을 여는데, 대립 현안들이 많지만 수교협상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미국도 북한과 관계개선하면서 대북 경제보상이 필요한데 이 부분에 대한 일본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북·일 수교협상에서 미국쪽의 수교 압력, 영향력 행사도 예상된다.
서주석: 일본도 큰 흐름에 따를 것이다. 그동안 북·일 수교협상이 잘 안 된 것은 사실 일본의 외교적 리더십 부재에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과거 중국과 일본의 수교 때 중-일간 현안이 해결이 안된 채 남아 있었지만 수교부터 먼저 했던 전례가 있다.
이철기: 한반도 평화의 조건에는 남북 당사자들의 관계개선뿐 아니라 남북과 주변강대국들의 관계개선도 포함된다. 이른바 교차승인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우리의 안보정책이 미국 일변도가 아닌 다변화·균형화돼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됐다. 또 남북간 대북강경책을 써서 남북이 갈등관계에 있을 때는 항상 우리가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상실해왔다는 게 과거의 교훈이다. 지금과 같은 화해협력 분위기만이 남북 주체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중요한 조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방제 수용이 적화통일인가
김연철: 정부의 포용정책이 한반도 정세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중요한 것은 남북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 내부의 인식이다. 우리 내부에 논란거리가 많다. 그 중에 통일방안 문제도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공동선언문 제2항에 보면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측의 국가연합제의 공통점을 인정하고 그 기초 위에서 협의한다’는 식의 표현이 나온다. 이 내용은 사실 단계론적 통일방안에 남북이 합의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노태우 정부 이후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이 단계적 통일방안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둘러싸고 논란을 빚는 것은 소모적이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되면 적화통일이 된다는 식의 주장은 정치적 선동이다.
서주석: 공동선언문은 사실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국가연합제, 두 방식에 공통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지 합의했다는 게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연방제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다. 공통성을 확인한 부분은 사실 국가연합이나 낮은 단계의 연방제나 모두 남북의 지방정부가 외교, 군사 나눠갖고 양쪽이 경제, 정치, 체제 등을 다르게 운영한다는 것이 전제돼 있다. 따라서 남북이 상당 기간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로 전쟁하지 않고 공존하자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느냐의 문제는 어쩌면 국민투표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정치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철기: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외교권과 군사권을 지방정부가 갖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연합에 가까운 형태다. 또 공동성명을 통한 통일방안 합의는 흡수통일 안 하겠다는 것에 합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성명은 남북간 통일방안과 관련해 평화·협상·점진 통일이라는 3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정리 박병수 기자suh@hani.co.kr


(사진/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 교수)

(사진/김연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사진/서주석 국방연구원 북한군사연구팀장)









